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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

by 해피이즈나우 202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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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은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오신 김수환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인데요.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김수환추기경 기념관을 주어 김수환 추기경의 사랑을 느끼도록 구성된 곳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생가가 있는 군위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을 통해 김수환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에 있는 김수환추기경 기념관

 

기념관은 옹기를 테마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빚다, 질박하다, 견디다, 품다, 비우다, 숨쉬다 등 6가지 이야기로 김수환 추기경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김수환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18:00, 11~2월엔 09:00~17:00

(공원은 24시간 개방)

휴관일(휴무일) 없음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무료

 

김수환추기경 기념관 앞에 적혀 있는 바보나무

바보 성자라는 그의 애칭으로 만든 나무인가 봅니다.

 

입구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 동상

 

김수환 추기경 역사관 입구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면서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영석은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를 팔며 이곳저곳 떠돌면서도 부모의 독실한 신앙심을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1895년 경상도 칠곡의 한 신자촌에 정착해서 서중하 마르티나와 혼인을 했는데, 김수환 추기경의 외가 역시 신앙심이 매우 깊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를 거치면서 꿋꿋하게 대두지역에 신앙을 지펴 대구 교회 창립의 밑거름이 된 인물이었고, 외삼촌 역시 수도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을 위해 평생 동정으로 살아 서동정이라 불리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학창시절 - "너는 커서 신부가 되거라"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던 아버지 김영석이 세상을 뜨자 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는 포목행상과 옹기를 팔며 집안의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등에 짊어진 옹기의 무게만큼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산 아버지, 홀로 8남매를 키우며 어려운 세상사를 겪으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신앙심을 보면서 어린 김수환 역시 신앙심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학생 김수환에게 '너는 커서 신부가 되거라'라는 단호한 말씀에 군위 보통학교 5학년을 마친 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해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학업을 이어나갔습니다.

 

1941년 일본 도쿄 상지대학으로 유학했으나 1944년 1월에 강제 징집되어 지치지마 섬으로 보내졌고, 해방 후 전범재판 증인으로 1946년 3월 괌으로 갔다가 9월에 일본에 돌아온 후 1947년 1월에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편입해 사제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청년 김수환은 4년 후인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세례명 스테파노)되었고 이후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사목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53년 4월부터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신부 겸 교황청 피데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서 성의중고교 교장신부를 겸했습니다.

 

김수환 신부는 1956년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1964년 귀국한 김수환 신부는 1966년까지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역임했고, 주교 수품을 하면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됐습니다.

2년 뒤 대주교로 승품했고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시골뜨기 주교에서 한국 천주교의 중심인물로 급부상한 김수환 대주교는 30여년 동안 격랑의 한국사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1969년 3월 29일, 당시 136명의 세게 추기경 가운데 사제서품을 받은 지 15년 만에 세계 최연소추기경에 임명됐습니다.

 

게다가 한국인 추기경으로는 최초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0년대 정의와 인권을 유린한 유신독재정권에 맞선 세상의 빛과 소금이었습니다.

 

결코 침묵하지 않으며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경계선을 제시하며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과 맞서면서 당시 명동성당이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됐으며 정부의 압력도 거세게 맞닥뜨렸습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광주의 아픔을 어루만지기도 했습니다.

 

5월 20일 김수환 추기경은 윤공희 대주교에게 1천만 원을 전달했고, 평화해결과 진실규명, 부상자 치료를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계엄군의 발포가 이어졌고, 7월 22일 '광주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며'라는 제목으로 정부에 대한 비판 내용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종교 간 화합을 추구하기도 했는데요.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등지며 살았던 1970~80년대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해 한발 먼저 다가서며 대화의 통로를 개척했습니다.

 

 

 

1997년엔 법정스님이 세운 길상사 개원식 때 이례적으로 축사를 했으며, 불교계는 김 추기경의 열린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아울러 2000년엔 성균관대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흔쾌히 받았는데, 유교를 존중하는 차원이었습니다.

 

또한 김수환 추기경은 민족의 대화합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1975년부터 1998년까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임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남북화해협력을 시도했습니다.

1989년 북한 측 가톨릭 신자들을 제44차 성체대회에 초대하기도 했으나 북한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세족식을 해주는 모습

 

사회적 약자를 보살핀 김수환 추기경, 약자의 벗이 되다

 

김수환 추기경이 꿈꿨던 세상가난하다는 이유로 덜 배웠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그에게 사람은 그 자체로 귀하고 존엄한 존재였습니다.

 

추기경이 된 후 그는 이런 신념을 하나씩 실천해 나갔습니다.

특히 철거민들을 자주 찾아다녔고, 빈민운동을 위해 아낌이 없었습니다.

 

 

 

2007년 5월 30일 동성고 개교 100주년 기념 미술전시에 삼석한 김수환 추기경은 방명록에 평범한 사람 하나를 그리고 '바보야'라고 적었습니다.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사랑과 진실 그 자체인 걸 알면서도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산다는 이유였으며,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바보 성자'라 불렀습니다.

 

1964~1966년 5월까지 가톨릭 신문에 재직했던 김수환 추기경 

 

당시 열악한 상황과 주간신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며 공의회 소식을 심층적으로 보도하며 신자들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2년의 짧은 기간 동안 가톨릭신문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것입니다.

 

사진으로 보는 김수호나 추기경의 신앙과 생애(1922~2009)

 

그의 마지막 말씀은 '서로 사랑하십시오'

 

김수환 추기경의 유품

 

김수환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8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으며 그의 묘소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종교계의 지도자를 넘어서 70~80년대 격동기 시절 한국의 민주화에 앞장선 인물로 대변됩니다.

1968년 2월 '사회정의와 노동자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 발표를 통해 노동자들을 대변하면서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에 나선 데 이어, 1971년 성탄 자정미사에서 장기집권하려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강론을 시작으로 정치적인 면에서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는 정치권력에 맞선 최후의 보루로 명동성당을 지켜내는 등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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