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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인천시 여행

고양 가볼만한 곳, 최영 장군묘

by 해피이즈나우 2021.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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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가볼만한 곳, 최영 장군묘

 

 

딸아이와 역사탐방을 하기 위해 고양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먼저 들린 곳은 고려의 재상이자 명장이었던최영 장군의 묘.

 

산속 깊이 자리한 묘소이지만, 등산객들과 일부터 아이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키기 위해 가족단위의 여행객들이 다녀가더군요.

저 역시 한 달 전에 방문했다가 딸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방문한 곳이네요.

 

죄 영장 군묘 입구에는 조선시대 경안군묘와 임창군묘도 있어서 역사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최영 장군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마을에서 15분 정도 산을 따라 올라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대자동 마을에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에 최영 장군의 평생 실천한 명언인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최영 장군묘는 별도의 관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언제나 관람이 가능합니다.

 

최영장군묘 진입로 입구에서 우측으로 조금 들어가면 경안군과 임창군묘가 있습니다.

소현세자의 아들과 손자의 묘소.

 

 

 

소현세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와 인열왕후 한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민회빈 강씨와 혼인하여 경선군 이석철, 경완군 이석린, 경안군 이석견, 경숙군주, 경녕군주, 경순군주 등 3남 3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경안군(1644~1665)은 소현세자의 3남 3녀 중 3남이며, 임창군 소현세자의 손자이면서 경안군의 아들인 것입니다.

 

묘가 세 개 있는데, 가장 아래쪽은 임창군과 경안군의 후손의 묘로 보이고요.

중간이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창군 묘, 가장 위쪽이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안군의 묘라고 합니다.

 

소현세자 13세에 왕세자로 봉해졌고, 정묘호란을 겪었고, 병자호란으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세자빈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기도 했죠.

 

8년 만인 1645년 2월에 청나라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했으나, 그해 4월 갑작스럽게 죽고 맙니다.

소현세자는 고양의 서삼릉 소경원에 묘가 조성되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자손, 경안군묘와 임창군묘

 

중간에 있는 묘가 임창군 이혼 부부의 합장묘라고 합니다.

 

임창군 이혼의 자는 선경이며, 인조의 증손, 소현세자의 손자, 경안군의 맏아들입니다.

 

임창군 묘 뒤로 높은 언덕 위에는 경안군 이회 부부의 합장묘가 있습니다.

경안군 이회는 조선조 인조의 손자이며, 바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입니다.

 

다시 입구로 되돌아와서 최영장군묘로 향했습니다.

영상의 포근한 날씨지만 산속의 계곡은 아직 한겨울이네요.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최영장군 묘소 입구가 나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최영장군 아버지와 본인의 묘가 있습니다.

 

최영 장군(1316~1388)은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성계로 하여금 끝내 죽임을 당한 고려 충신입니다.

 

 

 

최영은 동주 최씨로 철원(충남 서산 출신이라는 설도 있음)에서 태어나 고려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 회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했다고 합니다.

특히 공민왕 5년에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되찾기도 했다고 합니다.

최영장군묘 앞을 통해서 지나가는 길은 고양누리길로 이 길을 통해 1.3km 정도 가면 중남미 문화원과 고양향교가 나옵니다.

 

[고양여행] 고양향교 & 중남미 문화원

 

이곳이 최영장군묘가 있는 곳입니다.

 

최영 장군은 고려 우왕 14년(1388)에 명나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여 팔도통도사(문화시중)로서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좌군과 우군통도사에 조민수와 이성계를 두고 3월에 개성을 출발해 평양에 도착하나, 우왕의 만류로 평양에서 출정하지 못하고 왕과 함께 개성으로 돌아오게 되죠.

 

대신, 조민수와 이성계는 요동을 출정케 했는데, 이성계는 조민수를 꾀어 요동 진군을 포기하고 5월에 개경으로 역진격(위화도 회군)하게 됩니다.

최영장군은 6월에 남은 군사로 대적했으나 역부족, 곧바로 체포되어 고양으로 귀양을 가서 같은 달 합포로 갔다가 7월에 충주, 다시 12월에 개경으로 옮겨져 참수를 당합니다.

 

당시 나이 73세, 그의 아버지가 묻혀있는 고양의 이곳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습니다.

 

최영 장군은 임경업 장군 및 남이 장군과 함께 한국의 주요 장군신으로 모셔지지만, 이 가운데 최영 장군이 가장 널리, 가장 열렬히 숭앙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실제 많은 사람들은 그이 죽음을 슬퍼하며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섬겨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최영장군 묘 옆에는 좌우로 문인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최영 장군은 권세를 탐하여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죄로 참형에 처하려하자 최영은 평생에서 탐욕을 했다면 죽어서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최영의 무덤엔 풀이 나지 않아 탐욕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고, 고양시에서 관리에 들어가면서 1976년부터 풀이 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최영장군묘 위에 있는 분은 최영장군의 아버지인 최원직의 묘입니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흔히 최영 장군의 신념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아버지 최원직의 신념이고, 이를 최영에게 가르침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부전자전이 따로 없네요.

 

요즘 시대에서도 이를 실천하기 어려운데,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고려 말에 이런 청렴결백한 재상이 있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할 일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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