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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

by 해피이즈나우 2026.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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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은 서울 동쪽에 있는 9기의 조선왕릉(15개의 봉분)이라는 의미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이곳에 잠들어 있어 조선왕릉이 제일 많은 곳입니다.
아울러 원이나 묘가 아닌 왕릉만 있는 곳이 바로 동구릉이기도 합니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이 처음 조성되었고, 이후 문종의 현릉, 선조의 목릉, 현종의 숭릉, 장렬왕후의 휘릉, 단의왕후의 혜릉, 영조의 원릉, 헌종의 경릉이 차례로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능의 개수에 따라 동오릉, 동칠릉으로 불리다가, 1855년(철종 6) 추촌 문조(효령세자)의 수릉이  이곳에 옮겨지면서 동구릉이 완성되었습니다.

 

[조선왕릉] 조선왕릉이 가장 많은 구리 동구릉(입장료 및 주차장 정보)

 

오늘은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와 그의 두 번째 비인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 원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동구릉 원릉의 홍살문

향로와 어로의 직선으로 정자각과 봉문이 놓여 있습니다.

 

원릉은 동구릉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데요..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의 쌍릉입니다.

 

원래 영조의 능은 첫 번째 부인인 정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고양 서오릉 홍릉에 가묘로 조성되어 있었으나, 영조가 승하 후 현재의 위치에 새로 조성했고, 이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옆에 묻힌 것이라고 합니다.

 

 

 

원릉일대 모습

 

이곳은 원래 1673년 여주 영릉으로 이전했던 효종의 옛 영릉 자리였는데요.

그때 석물 등은 땅에 묻었다가 1674년 현종이 세상을 떠난 후 숭릉을 조성할 때 재사용했고, 파손되어 재사용하지 않은 일부 돌거리를 원릉 조성할 때 사용했습니다.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연잉군)로 1721년(경종 1)에 왕세자가 되었고,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선 27명의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고(83세),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52년)습니다.


탕평책을 통해 붕당 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균역법을 실시하며 민생을 돌본 성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격이 매우 깐깐하고 결벽증적 성향이 강해 주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런 완벽주의 성향 탓에 아들 사도세자를 강하게 몰아세웠고, 결국 임오화변(1762년)을 통해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참혹한 비극을 낳기도 했습니다.

 

왼쪽에는 수라청이, 오른쪽엔 수복방이 있습니다.

수라청은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고 진설하는 곳이고, 수복방은 능원을 지키는 사람이 머무는 공간입니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1759년(영조 35) 15세 나이로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습니다.

의붓아들인 사도세자보다도 10살이 어렸습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1800년 증손자뻘인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1803년까지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신유박해를 통해 남인과 시파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며 조선 후기 정국을 흔든 여걸이었습니다.

 

정자각 위에 쌍릉으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 원릉

 

정성왕후 서씨(1692~1757)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704년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영조)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르고 영조가 왕세제가 되면서 왕세제빈이 되었고, 1724년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가장 오래 재위한 영조의 반려자로 조선 역대 왕비 중 가장 오랜 기간(33년) 왕비에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혼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성왕후의 친정가문인 노론 계열이라는 이유로 영조의 사랑을 받지 못한 듯합니다.


영조의 까다로운 수발을 다 들고, 자신이 낳지 않은 사도세자와 화완옹주를 친자식처럼 아끼며 왕실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세자가 울화병에 걸렸을 때도 그를 유일하게 감싸 안아준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결국 스트레스와 지병으로 후사 없이 66세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릉의 정자각

 

정자각은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모시던 곳으로, 위에서 봤을 때 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제향음식을 차려놓는 정전과 제례를 올리는 배위청이 합쳐진 전각입니다.

 

 

정성왕후는 서오릉 홍릉에 안치되어 있는데요.

당시 정릉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능침 왼쪽에는 영조의 가묘를 조성한 쌍릉입니다.

 

영조가 죽으면 훗날 정성왕후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요.

50년 넘게 함께 살았을 땐 살갑게 대하지 못했지만, 무덤은 같이 사용하고 싶었나 봅니다.

 

하지만, 나중에 영조가 세상을 떠난 후 정조는 동구릉 원릉에 두 번째 부인인 정순왕후의 봉분 옆에 묻히게 함으로써 정성왕후로서는 서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지금도 홍릉엔 가묘가 있어 쌍릉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왕릉] 고양 서오릉 - 경릉(덕종과 소혜왕후), 홍릉(정성왕후), 창릉(8대왕 예종), 대빈묘

 

원릉 정자각에서 바라본 진입로 모습

 

원릉 정자각 제향공간

기존 조선왕릉과 다르게 원릉부터 능침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어 문석인과 무석인을 하나의 단에 배치했다고 합니다.

 

원릉의 기신제는 매년 4월 22일입니다.

 

원릉의 비각

 

원릉 비문

 

좌측은 영종대왕 원릉(1776), 가운데는 영조대왕 원릉(1890), 우측은 정순왕후 부좌(1805)라고 적혀 있습니다.

1776년에 건립된 원릉 표석은 정조가 썼고, 1890년에 조성한 표석은 고종이 썼습니다.

 

왕릉의 비각에는 왕과 왕비의 생애, 시호, 업적, 능의 조성 기록 등이 새겨진 비문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조선 왕실의 권위와 유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평생 영조에게 냉대받았던 정성왕후는 죽어서라도 함께하자는 영조의 약속을 믿고 서오릉(홍릉)에서 자리를 비워둔 채 홀로 기다렸지만, 영조는 정조의 결정에 의해 동구릉(원릉)에 묻혔고, 결국 그 옆자리는 영조가 맞이했던 51세 연하의 계비 정순왕후의 차지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을 괴롭혔던 노론세력에 대한 복잡한 감정으로 정조의 소심한 복수(?)라고 생각될 듯합니다.

 

 

동구릉 원릉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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