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이봉창/윤봉길/백정기/안중근), 임정요인 묘역
효창공원에 나들이는 처음인데요.
독립투사들의 묘역 등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었습니다.
효창공원(효창원)을 둘러보고, 김구 선생 묘와 백범기념관 등에 대한 내용은 아래링크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효창공원 / 효창원 (용산 가볼만한 곳)
김구선생 묘와 백범기념관 - 효창공원
효창공원 세 번째 이야기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 의사의 묘가 있는 삼의사 묘역과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이 안장되어 있는 임정요인 묘역 이야기입니다.
먼저, 삼의사 묘역입니다.
삼의사는 1946년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이곳에 봉환, 안장되었는데요.
좌측부터 순서로 안중근 의사의 묘(가묘), 이봉창 의사의 묘, 윤봉길 의사의 묘, 백정기 의사의 묘입니다.
삼의사 묘 왼편에는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고자 마련한 빈 무덤이라고 합니다.
효창공원의 김구 선생묘, 삼의사 묘, 임정요인 묘는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는데요.
삼의사묘는 효창공원 입구 야구 배트처럼 생긴 효창공원 조형물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삼의사묘 묘 모습인데요.
세 명의 의사인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인 건 알겠는데 하나가 더 있어 처음엔 의아스럽게 생각했습니다.ㅎㅎ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빨리 발견되어 이곳에 안장되길 기원해 봅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묘
안중근 의사(1879~1910)는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중국 상하이로 넘어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하였고, 을사늑약 이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쓰셨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한국을 침략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고,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3월 26일에 뤼순감옥에서 순국했으나, 일제는 죄수묘역에 안장하고서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네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두 번째 자리에 위치한 이봉창 의사의 묘
이봉창 의사(1901~1932)는 서울 용산출신으로 용산 문창 보통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함께 일왕 폭살 계획을 세웁니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사쿠라다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오는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이 이봉창 의사의 사건은 일본인에게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세 번째 자리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의 묘
윤봉길 의사(1908~1932)는 중남 예산 출신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덕산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농촌 계몽운동에 힘썼습니다.
1930년 망명길에 올라 만주를 거처 상하이에 도착,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 대열에 나서게 됩니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겸 상하이사변 전승 축하기념식에 참석한 시라카와 대장과 일본 침략군관 수뇌들을 폭살, 중상을 입힌 뒤 현장에서 체포되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네 번째 자리에 위치한 백정기 의사의 묘
백정기 의사(1896~1934)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3.1 운동 후 상하이로 건나가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여 노동자 운동과 일본 상품 배격운동을 이끌었고, 일본 시설물 파괴 공작과 요인 사살, 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33년 상하이 훙커우 육삼정 연회에 참가한 일본 주중 공사 아리요시를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 6월 5일 순국하셨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이들 세 의사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국민적인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며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하루빨리 찾아 안장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삼의사 묘역에서 동쪽으로 가면 임정요인 묘역이 있습니다.
임정요인 묘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한 임정 주석 이동녕, 군무부장 조성환, 비서장 차리석 선생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가운데 이동녕 선생의 묘
이동녕 선생(1869~1940)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독립협회 활동과 언론, 계몽운동, 기독교청년회(YMCA) 운동 및 을사늑약 반대운동 등을 전개하였습니다.
1906년 북간도 망명 후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였고, 1907년 귀국하여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는 한편 언론과 교육활동을 하면서 항일 구국운동에 나섰습니다.
1910년 서간도에 망명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설립했습니다.
3.1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 국무위원, 주석 등을 지냈습니다.
1940년 중국 치장에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1948년 김구 선생이 주선하여 사회장으로 봉환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좌측의 조성환 선생의 묘
조성환 선생(1875~1948)은 서울 출신으로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부를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항일 비밀 결사인 신민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습니다.
1912년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의 만주 시찰 때에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여 옥고를 치렀습니다.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차장에 임명되었으며, 만주 북로군정서에서 군무부장을 지내면서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임정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복군 창설과 활동에도 기여하였고, 1945년 조국으로 돌아와 대한독립 촉성회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서거하였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우측 차리석 선생의 묘
차리석 선생(1881~1945)은 평북 선천 출생으로 평양 숭실중을 졸업하고 신민회에 가입, 105인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3.1 운동 째 만세운동에 주도족으로 참여하였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편집국장으로 활약했습니다.
그 후 임시의정원 위원, 국무위원 등을 지냈고, 임시정부가 없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 임정을 고수하며 1935년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비서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여 조국으로 돌아오려던 중 중국 충칭에서 세상을 떠났는데요.
1948년 김구 선생이 조선하여 사회장으로 봉환되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고, 1961년 부인 강리성 여사와 합장되었습니다.
효창공원엔 처음 방문했는데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왕가의 묘역이었다가 근래에 들어서서 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모셔진 곳이라는 정확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효창공원에 가시면 삼의사 묘약과 임정요인 묘역도 들러 참배하시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서울시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마 그친 여름날 맑은 안양천 풍경 (0) | 2020.07.25 |
---|---|
한양도성 이야기 (2) | 2020.07.24 |
영등포 양평동 중국집 배달맛집, 봉명성 (0) | 2020.07.20 |
여의도 한강공원 배달존 안내 (0) | 2020.07.14 |
노량진 수산시장 주차장 정보 (0) | 2020.07.08 |
낙성대공원 나들이(주차장정보) (0) | 2020.07.06 |
용산도서관 이용안내 및 옥상정원에서 보는 풍경 (0) | 2020.07.04 |
정조가 현륭원 참배시 머물던 행궁, 용양봉저정 공원 (0) | 2020.07.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