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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법정스님의 흔적을 찾아서, 길상사 진영각 이야기

by 해피이즈나우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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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흔적을 찾아서, 길상사 진영각 이야기

 

 

지난 설 연휴에 길상사를 찾았습니다.

길상사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정스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길상사 다녀오다

길상사 나들이

 

길상사는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김영한)이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감명을 받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세운 사찰입니다.

법정스님은 이곳에 길상사를 세우고 회주가 되었고, 길상사 진영각에서 생활하였습니다.

 

현재 길상사 진영각에는 생전에 사용하던 법정스님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유골이 모셔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길상사 진영각

 

법정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군에서 태어나 목포공립상업중학교를 졸업하였고, 목포상과대학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1955년에 통영 미래사에 입산해 이듬해 승려 효봉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받고 1959년 통도사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송광사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등을 지냈습니다.

 

법정스님 유골 모신 곳, 송광사 불일암과 함께 두 곳에 안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법정은 종교적이고 피안적인 글만 썼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불교계 인사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나섰던 불교 승려로서 그 시절에 몇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생에 주로 암자나 산골에서 살았던 것은 맞지만,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개신교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함석헌이 만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나 강원용 목사 등 타종교인들과 종교 간 대화에 앞장서며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에 송광사 불일암에 틀어박혔고, 그곳에서 '무소유(1976년)) 등을 통해 돈과 권력이면 다 된다는 조류와는 다른 삶의 길을 끊임없이 제시했습니다.

 

또한 송광사에 ‘선수련회’를 만들어 산사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전했는데, 오늘날의 템플스테이의 원조가 됐습니다.

법정이 머무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전통과 현대, 불교와 대중의 소통이 있었는데, 그는 관계의 단절자가 아닌 가교자였습니다.

 

길상사 시절 머물렀던 진영각

 

1994년에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으며, 1996년 서울 도심의 요정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가 되었습니다.

 

기생 출신으로 백석 시인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김영한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스님에게 대원각 부지 7천여 평을 희사해 절로 삼겠다고 요청했던 것.

이것도 일부는 "무소유라더니 땅은 덥석 받았네?"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 법정 스님 본인은 10년 동안 안 받고 버티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1996년에야 시주를 받아들인 것이고, 단월인 김영한은 2년 뒤인 199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법정스님이 진영각에 있으면서 앉았던 의자를 재현해 놓은 의자입니다.

 

법정스님은 생전 불교계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가톨릭 등 다른 종교와 교류를 가졌고, 그 덕에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스님이었습니다.

 

법정스님이 실제 사용하던 의자 사진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법정스님은 2010년 3월 11일에 78세로 입적했습니다.

입적 이후 원적과 함께 자신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고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자신에게 신문을 배달하던 사람에게 전해 달라는 법정의 유지가 공개되었습니다.

이에 고인의 뜻을 따라 일체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2010년 3월 13일에 전남 순천시 송광사에서 다비를 진행하며, 조화나 부의금을 받지 않았고요.

다비식 이후 나오는 사리는 유지에 따라 수습하지 않았으며, 유골도 49재까지 송광사와 길상사에 안치했다가 조계산 불일암과 강원도 수류산방 인근에서 비공개로 산골하였다고 합니다.

 

 

길상사 진영각 생전 법정스님이 사용하던 유품과 영정을 전시하고 있는데요.

생전에 법정 스님이 나무 소비를 이유로 지인들에게 일반 화장장에서 다비해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있습니다.

만약 그 말이 진짜였다면, 법정 스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무위키 참고)

 

법정스님이 생전 편찬한 책들

 

무소유를 비롯해 좋은 말씀, 스스로 행복하라, 낡은 옷을 벗어라, 설전, 꽃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오두막편지, 인연이야기, 산에는 꽃이 피네, 맑고 향기롭게, 인도기행 등 정말 많은 책을 출판하기도 하셨습니다.

 

법정스님이 쓴 편지와 각종 생활 유품들

 

법정스님 초상화

 

법정스님이 사용하더 다기세트와 지필묵

 

평상시 입었던 옷으로 누더기가 된 모습이네요.

그의 무소유가 강렬하게 다가 오는 듯합니다.

 

살아생전 이해인 수녀님에게 쓴 편지글

 

1994년에 시민 사회운동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는데, 현재 길상사 지장전 옆에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법정의 '무소유'와 고려말 충신인 최영 장군의 '황금보기를 돌같이하라'라는 말이 일맥상통하는 듯 여겨집니다.

우리사회의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고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무엇인가? 불교도 기독교도 혹은 유태교도 회교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바로 친절이다. 친절은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 2004년 하안거 해제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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