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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화성 융릉과 건릉(융건릉) 역사문화관

by 해피이즈나우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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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화성 융릉과 건릉(융건릉) 역사문화관

 
 
화성 융릉과 건릉(융건릉)은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현경왕후)가 묻혀 있는 융릉과 정조와 효의왕후가 잠든 건릉을 말합니다.
오랜만에 화성 융건릉을 방문해서 산책을 했습니다.
 
[조선왕릉] 사도세자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의 왕릉, 화성 융건릉(융릉과 건릉, 현륭원)
 
화성 융릉과 건릉 입구에 융릉.건릉 역사문화관이 있어서 관람을 했는데요.
영조대부터 정조대까지의 역사이야기와 함께 융건릉이 조성되게 된 경위 등에 대해서 정리했습니다.
 

융릉.건릉 역사문화관
화성 융건릉 매표소를 통과하면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융릉.건릉 역사문화관은 단층으로 조그맣게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융건릉을 이해하려면 21대 임금인 영조부터 22대 임금인 정조 시대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1724~1776년, 56년 재위)는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던 임금이었습니다.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적극 구사하여 국정 안정을 도모했던 임금으로 역사는 평가하는 반면,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당쟁으로 뒤주에 갇혀 죽게 만든 비정한 아버지로도 평가받기도 합니다.
 
영조는 처음 얻은 아들인 효장세자를 10년 만에 병으로 잃고, 7년 뒤인 42세에 사도세자를 얻으며 영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15살이 되자 대리청정을 시키며 무려 5차례의 양위파동을 거쳤는데요.
지나친 당쟁으로 부자 간의 불신이 깊어지며 결국 영조는 뒤주에 갇혀 아들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죠.
 

 

 
당시 사도세자는 매우 총명했고 무인적 기질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도세자는 영조 19년(1743), 혜경궁 홍씨와 혼인했고, 7년 뒤인 1750년에 첫아들인 의소세손을 낳았지만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1752년에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군으로 추앙받는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였습니다.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10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정조, 1735~1762)가 당쟁에 휘말려 왕세자의 신분에서 폐위(1762년, 영조 38)되어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목격한 후,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무척 후회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사후에는 아들의 왕세자 신분을 회복시켜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정조는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8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극의 죽임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습니다.
1775년 대리청정, 다음 해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조는 왕위에 올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당쟁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고,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라는 칭호를 올렸고, 동대문구 배봉산 수은묘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영우원이라 하며 한 단계 격상시켰습니다.
1789년(정조 13)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화성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바꾸며 특별히 격을 높여 조성했고요.
1815년(순조 15) 혜경궁 홍씨(현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현륭원에 합장하였고, 고종 때인 1899년 원을 능으로 높여 융릉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연산군과 정조는 똑 같이 어린 시절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겪었지만, 어떻게 처신했는지에 대해서 역사는 비교평가하고 있습니다.
 

1762년 장조(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금의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수은묘를 조성했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 무덤을 묘에서 원으로 격을 올리면서 영우원이 되었습니다.
1789년 다시 영우원을 이곳 화성 화산으로 옮겨 와 현륭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래의 수은묘(영우원)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신분을 왕으로 높이고자 했으나 생전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화성 화산에 모신 현륭원을 왕릉에 버금가도록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대 황제가 된 고종은 직계 선왕들의 신분을 황제로 높이기 시작했는데요.
이때 사도세자를 왕으로 높여 장종으로, 현륭원을 융릉으로 높였고, 곧이어 장종을 다시 황제로 높여 장조라 했습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융건릉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능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왕릉 총정리 (분포, 구성, 관람안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이야기
조선왕릉과 조선왕 계보(조선왕 순서) 알아보기


 

 

 
화성에는 융릉과 건릉이 있는데요.
융릉은 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현경왕후 홍씨(혜경궁, 1735~1815)의 조선왕릉입니다.
건릉은 융릉 곁에 있으며, 조선 22대 임금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와 효의왕후 김씨의 조선왕릉입니다.
 
1789년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겨 왔고, 정조 자신도 이곳에 무덤을 만들고자 뜻을 밝혀 1800년 정조의 건릉을 이곳에 만들게 된 것입니다.
 

현륭원의 조성
 
정조는 장고의 관이 배봉산의 영우원을 떠나는 것과 현륭원에 장조의 관을 모시는 모습 모두를 참관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정조는 12차례 현륭원을 찾아 극진히 관리했습니다.
 
혜경궁 홍씨(현경왕후, 1735~1815)는 정조의 어머니로 사도세자의 빈으로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영조는 사도세자라는 호를 주며 현경왕후에게는 혜빈이라는 존호를 내려주었습니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뒤에 혜빈궁의 명칭을 혜경궁으로 바꾸었으며, 1783년(정조 7)에는 자희와 효강이라는 존호를 올렸습니다.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
 
정조는 1800년 세상을 떠난 뒤 정종이라 불리게 되었고, 능은 평소 아버지 가까이 묻히기를 원했던 뜻에 따라 현륭원 동쪽에 만들고 건릉이라 불렀습니다.
1821년(순조 21) 왕비 효의황후의 능을 만들 때 건릉을 현륭원의 서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이 1899년 정종을 황제라 추존해 정조라 부르게 하고, 건릉은 왕릉의 형식을 그대로 둔 채 표석만 황제릉의 내용으로 바꾸었습니다.
 

 

 
효의황후 김씨는 1762년(영조 38) 정조가 왕세손일 때 왕세손빈에 책봉되었습니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고, 1821년 세상을 떠나 효의왕후로 불렸습니다.
정조의 건릉에 함께 모시려 했으나 능 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건릉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함께 모셨습니다.
 

조선왕릉 분포도
 
조선왕릉 총정리 (분포, 구성, 관람안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이야기
조선왕릉과 조선왕 계보(조선왕 순서) 알아보기

 

조선왕릉 공간구성
 

 

정조의 현륭원 거동길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화성으로 옮긴 후 화산 부근의 읍치를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계획도시 수원 화성을 축성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축성 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수원 화성행궁은 수원 화성의 부속건물로 정조가 현륭원에 들릴 때 머물다 간 곳입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 묻어 있는 것이며,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수원 화성박물관과 용주사 기획전시
수원 화성행궁
수원 화성박물관과 용주사 기획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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