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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아들)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조선왕릉, 광명 영회원

by 해피이즈나우 2023.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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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아들)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조선왕릉, 광명 영회원

 

 

광명 나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 범안로를 지나가다가 영회원 간판이 보여 잠시 들렀습니다.

 

영회원은 조선 제16대 인조 임금의 큰아들인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묘소로, 1991년 10월 25일 사적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민회빈 강씨는 우의정 강석기의 딸이며, 강감찬 장군의 19대 손녀라고 합니다.

 

영회원을 잠시 보려고 갔지만, 묘소입구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어 밖에서 잠깐 보고 오는데 그쳤습니다.

영회원을 통해 소현세자와 그의 부인 민회빈 강씨 이야기를 정리해 봤습니다.

 

영회원은 광명시 노온사동 노온저수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좁은 비포장길을 1km 정도 달리니 나오더군요.

 

영회원 진입로 모습

 

사적으로 지정된 영회원 표지석과 설명

 

조선 16대 임금 인조(1592~1649, 재위 1623~1649)의 아버지는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5남이었던 정원군이며 연주군 부인 구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죠.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며, 청나라가 쳐들어 온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을 맛보았던 임금이었습니다.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정치력도 없었고, 청나라에 인질로 갔던 장남 소현세자의 꿈을 냉정하게 짓밟은 조선 최악의 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인조와 인열왕후의 큰아들인 소현세자(1612~1645)는 1625년 14살에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에는 전주로 피신했고 그해에 강석기의 딸, 민회빈과 혼인했습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하며 삼전도의 치욕을 맛봤습니다.

청나라가 인질을 요구하자 소현세자는 자진해서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 수도 심양(선양)으로 가서 심양관에 억류되며 8년 간의 청나라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는 서구 문명을 접하며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며 살았고,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고 조선을 핍박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조선 백성 보호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1645년 음력 2월, 청나라에서 더 이상 조선을 경계할 필요가 줄어들자 소현세자를 조선에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인조는 가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의 개혁을 단행하고자 한 소현세자를 감시하고 박대했습니다.

 

그리고 4월 26일 갑자기 34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는데, 역사학자들은 병사가 아닌  인조가 독살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장례식을 크게 간소화함을 물론 죽을 때까지 소현세자의 무덤인 고양 서삼릉의 소경원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현세자의 자손인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최영장군묘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양 가볼만한 곳, 고양 서삼릉(희릉, 예릉, 효릉)

소현세자의 자손, 경안군묘와 임창군묘

 

같은 해 음력 6월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해 세자에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 되었습니다.

 

잠긴 문 안으로 보이는 풍경

소나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영회원이 있습니다.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1611~1646)는 우의정 강석기의 딸입니다.

1627년(인조 5) 소현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고, 병자호란의 패배로 청나라에 소현세자와 볼모로 갔을 때 진취적인 기상과 지혜로운 처신으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등 조선 궁궐의 여성상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왕을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하여 1646년 사약을 받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어 어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서 병으로 죽었고, 노모와 4형제 역시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조선 역사에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처럼 비극을 당한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숙종 44년(1718년)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복권되어 민회묘라 하였고, 1870년(고종 7)에 무덤을 영회원으로 격을 높였습니다.

 

영회원 모습

무덤 주변의 시설은 봉분,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석양, 석호, 문인석, 석마 등이 있으며, 비석과 정자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영회원을 통해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이야기를 접하니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습니다.

8년의 청나라 볼모생활도 모자라 귀국하자마자 원인 모를 일로 남편 소현세자를 저 세상으로 보낸 후 모함을 받아 죽은 후에도 아들들과 그의 일가가 모두 처형을 당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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