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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성종의 셋째아들, 전주이씨 안양군묘(이항)

by 해피이즈나우 2024.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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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셋째아들, 전주이씨 안양군묘(이항)

 

 

안양시와 군포시에 걸쳐 있는 수리산을 등산하러 산본고등학교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수리산은 광주산맥을 이루는 산으로 태을봉(489m)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슬기봉(451m), 북동쪽에 관모봉(426m), 남서쪽에 수암봉(395m) 등이 있으며,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입니다.

 

태을초등학교와 산본고등학교에서 오르는 수리산 등산코스가 수리산에 오르는 최단코스의 등산로입니다.

 

수리산 등산코스 및 등산지도

수리산 등산코스 중 최단코스, 산본고~노랑바위~태을봉~관모봉

 

수리산 등산을 위해 산본고등학교 후문 쪽에 주차하니 전주이씨 안양군묘가 있어 잠시 둘러봤습니다.

 

안양군묘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세 번째 아들인 안양군 이항(1480~1505)부인 능성 구씨(1480~1556)의 합장묘입니다.

안양군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가 어머니이며, 부인은 능천군 구수영의 딸이고 동생은 봉안군 이봉입니다.

 

성종의 뒤를 이어 적장자인 그의 아들인 연산군이 조선 10대 임금으로 즉위했으나 어머니 폐비 윤씨가 폐위되었음을 알고 폭군으로 변해 왕위에서 쫓겨났었는데요.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가 이 일에 관여된 것을 알게 되어 관련된 인물을 처형하는 갑자사회를 일으켰습니다.

이때 안양군은 제천을 거쳐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1505년 어머니와 동생 봉안군 등과 함께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고, 제주도에 무덤을 조성했다가 중종 15년(1520) 부인의 요청에 따라 남양주로 옮겨졌으며, 이후 1900년 고종이 명성황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고 합니다.

 

연산군은 당시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윤리를 거부했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자신을 귀찮게 괴롭히던 사림들을 제거하고 절대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장녹수라는 궁녀에 빠져 놀아나며 패륜을 저지르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그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전주이씨 안양군묘 앞에 있는 태을초등학교

 

안양군묘는 산본고 후문과 태을초 정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출~일몰시간 외에는 출입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안양군 사당 공회사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제실인 수산제

제사와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수산제 건물 안에는 종택이 있는데, 종손이 기거하고 있다고 하며,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사당인 공회사 위에 안양군묘가 있습니다.

 

안양군 부부의 합장묘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향로석 가까이에 허리 부분까지만 형상화한 동자상이 있습니다.

성석 앞에는 장명등이, 양쪽으로 화강암 재질의 망주석, 문석인, 양석이 각 1쌍씩 배치돼 있어 사대부 묘역의 전형적인 석물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안양군와 능성 구씨의 합장묘 모습

 

연산군은 생모 윤씨가 폐위되고 죽은 이유로 후궁인 엄씨와 정씨의 참소에 있다고 판단했는데요.

두 후궁을 개궐 뜰에 묶어 놓고 손수 때렸다고 하며, 심지어 정씨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불러 때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봉안군은 어머니인 줄 알고 때리지 못했으나, 안양군은 갑자기 끌려 나와 누구인 줄 모르고 어명대로 어머니를 때렸다고 합니다.

 

묘역 좌측으로 가면 신도비와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연지 앞에 있는 비석

 

 

거북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안양군 신도비

 

1976년 신종묵이 글을 짓고, 이일형이 글씨를 쓴 것이라고 하는데요.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연지에 있는 거북바위는 원래 산본고등학교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장소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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