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한국)의 대표 전통마을 / 한옥마을 총정리
은평한옥마을에 있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 근현대에 이르는 은평 지역의 역사와 한옥의 전통과 미래를 아우르는 한옥전시관 등 다양한 전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박물관입니다.
은평역사실에서 한옥전시실로 올라가는 3층 계단엔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나라 전통마을 사진과 함께 설명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한국의 전통 한옥마을 22곳 중 10곳 정도 방문했으니, 개인적으로 40% 이상 방문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옥마을, 전통마을에는 어떤 곳들이 있는지 구경해 보세요.
은평역사한옥박물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이곳에 우리나라 한옥마을인 전통마을 22곳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옥이란 초가집과 기와집을 모두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엔 살기 불편한 나머지 초가집은 대부분 사라지고 기와집만 남아 있는 상태랍니다.
참고로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 전시된 우리나라 전통 한옥마을 사진과 설명은 대두분 상명대 김치년 교수의 것이라고 하니 참고 바랍니다.
영덕 괴시마을
영양 남씨 400년 동성마을로 마을의 주봉인 망월봉 아래팔(八) 자 형국을 이루는 마을입니다.
고려말 목은 이색의 고향이며, 원래 이름은 호지촌이었으나 이색이 원나라 유학 후 돌아와 마을형상이 회화나무가 많은 것이 자신과 친했던 한림학사 구양현의 고향인 괴시와 닮았다고 해서 바뀌었다고 합니다.
마을 주택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전형을 보여주며, 지금 남아 있는 고택들은 200여년 전에 지어진 건물로 'ㅁ'자형 구조이고, 뜰을 마주보고 서 있는 사랑채 뒤에 안채를 숨겨 안팎을 완전히 분리하는 사대부가의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은고택, 사곡댁, 영감댁, 해촌고택, 물소와고택, 괴시파종택 등 14채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안동 군자마을
예전에 낙동강 기슭에 위치한 ‘외내’를 재현한 마을로,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에 형성된 조선시대 초기 광산 김씨 김효로가 마을에 터를 잡은 이래 현재까지 약 20대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전통마을입니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외내가 수몰되자 마을 소유의 문화재를 원형 그대로 현재의 장소인 안동시 와룡면으로 옮기고 마을 이름을 군자마을이라 지었습니다.
이는 과거 ‘외내’에서 당대의 도학 군자가 여럿 배출되자 안동 부사였던 한강 정구(1543~1620) 선생이 “이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마을을 흐르는 시내에 있는 돌을 멀리서 보면 검은빛을 보인다고 하여 ‘오천 유적지’라고 불립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 탁청정은 1541년 김수가 지은 가옥에 딸린 정자가 있는데, 명필 한석봉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광산 김씨 종택의 별당인 후조당은 조선시대의 다양한 창호 형태를 볼 수 있고,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고 알려진 현판도 볼 수 있습니다.
광산 김씨 재사 및 사당, ‘운암 정사’라고도 불리는 침락정도 마을의 중요한 고건축물입니다.
경주 양동마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 문벌로 이어 내려온 한국 최대의 동성마을입니다.
마을의 별명이 '외손마을'인데 이는 처가를 따라 들어와 산 집안에 이언적 선생 등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출생, 번성한데 그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두 씨족 간의 은근한 경쟁은 마을의 공간 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언덕에 손씨들의 대종가 서백당이 자리 잡고 있다면 산기슭에 이 씨들의 대종가 무첨당이 위치하며, 마을 어귀 이 씨의 파종가가 위세를 뽐낸다면 한 모퉁이 돌아 손 씨들의 파종가 관가정이 있습니다.
골짜기를 달리하여 이 씨 가문의 설천정과 손 씨 집안의 수운정이 있어 대비를 이루고, 남촌에 있는 강학당과 안락정은 각 문중의 서당으로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을의 배치는 물자의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집들의 기본 구조는 대개 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습니다.
혼합 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ㄴ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습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을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주양동마을(심수정, 서백당, 무첨당, 향단, 관가정), 경주 전통민속마을 탐방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읍성 일대는 민속마을로,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흙으로 쌓은 성이었고 세종 대 석성으로 개축한 곳입니다.
이후 1626년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했을 때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하였습니다.
넓은 평야 지대에 쌓은 총길이 1,420m 높이 4m 너비 3-4m의 네모형 석성으로 1-2m 크기의 정사각형 자연석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아 끊어진 곳이 없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몇몇 부분이 성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데 이를 치성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에는 산을 의지한 위치에 지어졌고 고려는 주요 지방 도시에 규모가 작은 토성 읍성을, 조선시대에는 석성으로 개축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해안 근처 고을에는 거의 모두 읍성이 있었고, 내륙에는 큰 고을에만 있었다고 합니다.
낙안읍성에는 108세대가 실제로 생활하고 있어 남부 지방 특유의 주거양식을 볼 수 있고 부엌, 토방, 툇마루 등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가옥 9동(중요민속자료 92-100호)과 임경업 군수 비각(전남 문화재 자료 47), 객사(전남 유형문화재 170), 노거수 은행나무(전남 기념물 133) 등의 문화재가 있고, 당시 관아였던 관청 건물들이 있습니다.
산청 남사마을
조선시대 이후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 등이 정주해 온 마을로, 원래 마을 평이 진주에 속했던 시월리였으나 산청군으로 편입되면서 산청군 사월과 남사로 분리되었습니다.
남사는 닮은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낸 학문의 고장으로, 공자가 탄생하였던 니구산, 사수 등에서 차용한 마을 이름, 사양정사, 니동서당 등의 명칭에서 볼 수 있듯 책과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했습니다.
마을에는 산청삼매 중 하나인 원정매가 있는데, 원정매는 고려 시대 원정공 하즙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80년 이상 되는 홍매화 나무를 말합니다.
산청삼매는 고려 말 강희백이 심은 정당매, 남명 조식이 심은 남명매, 그리고 원정매를 말합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은 성주 이 씨 종가 이상택 가옥으로 안채는 18세기 초 사랑채는 19세기 초에 건축한 것이며, 마을에는 보물 1점을 비롯해 경남 문화재 자료 4점이 있으며, 마을 동편에는 만국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한 면우 곽종석 선생이 강학하던 이동 서당이 남아 있습니다.
대구 옻골마을
조선 중기의 학자 최동집이 1616년(광해군 8) 이곳에 정착하면서 경주 최씨의 동성마을이 구성된 마을입니다.
오래된 살림채는 1905년에 중건된 사랑채로 숙종 20년(1694)에 지어진 안채와 모두 박공지붕입니다.
'백불'은 대구 지역 가옥 중 가장 오래된 주택이며, '백불당'은 영조 18년(1742)에 지은 재실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그 뒤편에 2동의 사당을 지어 최동집과 최홍원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백불고택과 보본 당사당은 대구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고, 최홍원의 호 '백불암'은 '백 가지를 알아도 한 가지에 능하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겸손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을 반영해 지은 건물로, 마을 가장 안쪽에 있고, 마을 가장 안쪽 가운데서는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의성 산운마을
과거 급제자가 다수 배출되어 대감마을이라 불리는 전통 양반마을로, 16세기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영천 이씨 이광준이 처음 정착한 동성마을입니다.
마을 이름은 신라시대부터 불렸다고 전해지며, 수정 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이라 하였다 합니다.
화산인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금성산을 뒤에, 비봉산을 옆에 두고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요.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8세기 중엽에 세워진 학 운곡당, 19세기 초에 세워져 양진사숙이라는 교육기관으로 이용된 점우당, 그리고 앞쪽에는 학문을 닦는 강당이 있고 뒤쪽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 후묘 형식을 띤 소우당 등이 있습니다.
아산 외암민속마을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정이 이주해 오면서 예안 이씨가 대대손손 살기 시작하여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룬 500년 역사의 마을입니다.
이정의 6대손인 이간이 호를 '외암'이라 지은 후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밤나무를 깎아서 세운 남녀 장승과 열녀문이 있고, 곳곳에 조선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물레방아, 디딜방아, 연자방아 등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양반집과 50여 가구의 초가 등 크고 작은 옛집들이 대부분 원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습니다.
양반집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특색 있는 정원이 당시 양반의 생활 모습과 풍류를 느끼게 해줍니다.
초가 역시 예스러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과 주변의 울창한 수림이 마을의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마을에는 조선시대 이정렬이 고종에게 하사받아 지은 참판댁을 비롯해 송화댁, 외암 종가댁, 참봉댁 등의 양반집들이 남아있고, 특히 영암댁은 회화나무와 수석이 어우러진 정원이 아름답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한 마을에 전통적인 수법의 상류, 중류, 서민 가옥이 함께 남아 있어 마을의 형성이나 전통 가옥의 연구에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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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개평마을
개평이라는 지명은 두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 마을이 위치해 '낄 개(介)' 자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유래되었습니다.
또한 마을 앞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개들'이라고도 불립니다.
14세기 경주 김씨와 하동 정씨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후 15세기에 풍천 노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고 현재 마을에는 대부분 풍천 노씨와 하동 정씨가 거주하고 있습니다.
5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더불어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약 60여 채의 전통 한옥이 보존되어 있는데요.
개평마을은 정여창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일두고택은 1570년 정여창의 생가 자리에 지어진 이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번 중건되었고, 전형적인 경상도 양반집의 형태로 현재 사랑채와 안채, 사당 등 1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1820년대에 지은 풍천 노씨 대종가, 함양 오담고택과 1644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함양 개평리 하동 정씨 고가 등이 있습니다.
예천 금당실마을
금당실 마을은 조선시대 고가옥과 미로로 연결되어 있는 돌담길이 양반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전통마을로서 역사, 문화, 전통이 깃든 곳입니다.
마을 명칭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은 지형이라 하여 금당이라 불려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개량된 고택들이 자리하고 있어 전통생활양식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마을이며, 고택 탐방뿐 아니라 '지게 나뭇길'이라 불리는 좁은 돌담 흙길을 걷는 것은 금당실 여행의 백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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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개실마을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김종직의 후손이 대를 이어 주거하고 있는 선산 김씨 집성촌입니다.
무오사화(1498)에 화를 입은 그의 후손들이 이곳으로 피신 와 살기 시작하면서 약 165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후손들은 마을에 꽃이 피고 골짜기 또한 아름답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아름다울 가'와 '골 곡'을 써 '가곡'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짜기라 하여 '개화실'이라고도 하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발음이 변하여 '개애실'에서 '개실'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그의 5대 손 김수휘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점필재 종택으로 안채와 사랑채, 사당 등의 건물이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대청의 가운데 기둥만이 원형으로 된 것이 특징입니다.
중종이 즉위한 후 김종직의 신원이 회복되고 나서야 솟을대문을 만들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마을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점필재 종택, 도연재가 있으며, 건축물 이외의 문화재로 약 600년간 전해오는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 문서가 있습니다.
영주 무섬마을
조선 중기 17세기 중반 입향 시조인 박수와 김대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이래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동성마을입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의 우리말 이름으로 삼면이 내성천과 접해있는 전형적인 골도리 마을로 신라 불교가 전파되면서 만들어진 태극 모양으로 서로 안고 휘감아 돌아 산수의 경치가 절경을 이룹니다.
30년 전만 해도 나무다리를 놓고 내성천을 건너 밭으로 일하러 갔으며, 장마가 지면 다리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놓았습니다.
해우당고택은 19세기말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조언자였으며,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지은 집이며,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합니다.
안채에도 흥선대원군이 쓴 '대은정'이라는 현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반남 박씨 입향조인 박수가 마을에 들어와 건립한 만죽재를 비롯해 김위진 가옥, 담장 없이 지어진 김정규 가옥, 실학자 박규수의 글씨가 남아 있는 박재연 고택 등 총 9개 가옥이 경북 문화재 자료 및 경북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풍산 류씨 동성마을로 조선시대의 대 유학자 겸암 류운룡 선생과 서애 류성룡 선생이 태어난 마을입니다.
낙동강 물줄기가 S자 모양으로 마을의 동남서를 싸고 돌아간다고 해서 '물돌이 동'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하회라는 지명입니다.
풍산 류씨의 종택으로 류운룡과 류성룡이 출생한 보물 306호 양진당은 입암 류중영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이라고도 하는데, 사랑채는 고려 시대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안채는 조선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 고려와 조선의 건축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입니다.
조선 중기 명필로 꼽히는 미수 허목이 류성룡이 충과 효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단아한 전서로 써준 현판이 있는 충효당이고 하회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살림집인 북촌 유거와 수신와는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마을 북쪽의 99간 집 북촌댁, 하회 남촌을 대표하는 99칸 집인 남촌댁. 그 밖에도 규모가 있는 살림집으로 작천 고택, 주일재, 하동 고택들이 모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집들입니다.
겸암정사에는 퇴계 이황의 편액이 걸려있고,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을 구상하고 저술하였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성주 한개마을
조선 세종 때 아우가 거주한 때로부터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형성된 성산 이씨 동성마을입니다.
크다는 뜻의 '한'과, 나루라는 의미의 '개'가 합쳐진 말이며, 예전 마을 앞에 있던 나루 이름이 바로 한 개였고,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합니다.
마을은 대체로 안길을 기준으로 다섯으로 나뉘는데요.
주거지의 뒤쪽 중앙부를 한 개 또는 윗마, 동쪽과 서쪽을 각각 녘녘, 서녘, 진사댁 앞의 동서방향 길 주변은 도촌, 그 아래는 아랫막 또는 아랫마라고 불렀습니다.
이 마을의 공간을 구성한 중요한 특징은 여성공간을 진입로에서 가장 멀리, 가장 깊숙이 배치한 것인데요.
안채의 형태가 一자형, ㄱ자형, ㄷ자형 등으로 다양하지만, 변함없는 원칙은 부엌을 진입로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여 여성공간을 폐쇄적으로 위치시키려는 봉건적인 의도로 보입니다.
천경재, 월봉정, 한천 서당, 서륜재, 일관정, 귀락정, 여동서당 등의 재실이 있으며, 19세기부터 마을의 좌우 외곽부에 지어진 이 재실들은 서당을 겸했습니다.
제주 성읍민속마을
성읍리는 원래 제주도가 방위상 3현으로 나뉘어 통치되었을 때(1410-1914) 정의현의 도읍지였던 마을로서 제주도 옛 민가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민간의 주거공간이 읍성 내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곳입니다.
제주 특유의 올레를 거쳐 마당으로 들어서면 독특한 구조를 지닌 초가와 부속 건물, 돗통시, 우영, 물항까지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각 성문에는 제주의 상징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는데, 제주에 다른 돌하르방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아직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답니다.
마을 안길은 성곽 밖으로 고리형 도로를 돌리고 안으로는 ᅮ자형의 도로를 연결했고,.여기에 활 물의 길을 내고 올레를 활용하면 마을 전체적으로 집들이 고르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ᅮ자형의 주요 도로 외에는 직선으로 만들어진 길이 없고, 마을 내 모임의 장소는 대개 길이 만나는 지점에 만들어지는데, 큰 나무를 두고 걸터앉을 수 있는 평상이 있답니다.
동북쪽에는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 그 남동쪽으로는 객사가 있으며, 향교는 다른 고을과 달리 읍성의 서문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마을 민가는 대개 一자형 평면을 가진 집 2채를 중심으로 몇 가지 배치 방식으로 짜여 있어 제주도민속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가옥으로는 조일훈 가옥, 고평오 가옥, 이영숙 가옥, 한봉일 가옥, 고상은 가옥 등이 있습니다.
의령 입산문화역사마을
입산마을은 호국 역사와 전통문화 그리고 농촌다움을 함께 보존하고 있는 탐진 안씨 동성마을입니다.
마을의 원래 한자 지명은 설산인데 쉬운 토박이 말로는 설미마을이라고 불렀고, 오랜 논란 끝에 눈 설 대신 꼿꼿이 서다 입이라는 글자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육세 8효자 정려를 받은 효행의 가문으로 시작하여 임란 공신이자 증시조이신 지현 안기종 의병장 이후 조선말부터 해방 이전에는 애국지사 안효제, 안창제, 안회제 선생 등 세분 항일 독립운동 유공자가 나신 곳입니다.
1700년 초에는 지어진 설산제라는 고산 서당은 영남의 구학 본산으로 안효제, 안창제, 안회제 등 안씨 문중 자제들과 부근 사람들이 수학하던 곳이며, 마을 뒤에 있는 산속에 대나무, 소나무 숲으로 어우러진 고택입니다.
1910년 사립 창남학교를 지금의 상로제에 세워 경남에서 최초의 신학문 사립학교를 운영하기도 한 유서 깊은 마을인데요.
서리가 내리면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군자의 도에 따라 조상계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에서 상로제라 이름하였다 합니다.
주요 건축물로는 탐진 안씨 종택, 안준상 고택, 안호상 고택, 안범준 고택이 있습니다.
구미 일선리 고택문화재마을
1987년 안동군 임하댐 수몰 지역 주민과 문중이 이주하여 이루어진 마을로, 당시 선산군 동암하댐 수몰 지역에서 쫓겨난 안동 양반 수몰민들을 받아들여 마을 하나를 새로 만든 곳입니다.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 있었으나 현재의 자리로 옮겨온 용와 동택 및 침간정은 조선 후기인 유승현의 종택과 강학당입니다.
사랑채와 안채, 광채가 튼 ㄷ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주문을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ㅁ자를 이룹니다.
망천동 임당택 역시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에서 수몰로 인하여 옮겨왔는데 1775년(영조 51) 김규섭이 건립하였고 단 포고택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외에도 박곡리에서 옮겨온 삼가정, 수남 위 종택, 수곡리에서 이전한 동암정, 대야정, 근암 고택, 임하댁과 마령리에서 옮겨온 호고와 종택, 만송당 등이 있습니다.
봉화 달실마을
달실마을은 안동 권씨 중에서도 충재 권벌을 중심으로 일가를 이룬 동성 마을입니다.
마을 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을이라 부르게 된 곳으로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경승지라 했던 곳입니다.
경상도에서는 닭을 '달'이라 했기 때문에 예전부터 달실마을이라 불렸습니다.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청암정과 마을 앞을 흐르는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이 대표 경관입니다.
마을의 가옥들은 대체로 남서쪽을 향하고 있으나, 조금씩 다른 방향을 취하여 집들이 서로 가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 점이 독특합니다.
대표적인 가옥은 충재고택으로 솟을대문의 위아래에 곡선으로 휘어진 대들보가 있고, 마을 서쪽 끝에 있는 추원재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2009년에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라는 이름의 명승 제60호로 변경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고성 왕곡마을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한 전통 한옥 마을로 14세기경부터 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 용궁 김씨 등이 모여 사는 동성마을입니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의 한 분인 양근 함씨 함부영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인근 간성 지역에 낙향하였고, 손자 함영근이 이곳 왕곡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비롯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화된 후 150여 년에 걸쳐 형성된 마을입니다.
19세기를 전후하여 지어진 기와집들은 모두 강원도 북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양통집(한 용마루 아래에 앞뒤로 방을 꾸민 집)인데요.
긴 겨울이 수위를 견디기 위한 구조로, 특히 부엌 옆에 외양간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옥에는 대문과 담이 없어 앞마당이 개방적인데, 이는 햇볕을 충분히 받고 폭설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고, 뒷마당은 비교적 높은 담장으로 되어 있어 폐쇄적인 구조를 띠는데 이는 뒤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을 막기 위한 용도입니다.
또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 특성상 지붕에 쌓이는 눈의 무게를 지탱하고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붕 뒤쪽(북쪽)에 두꺼운 나무를 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아울러 왕곡마을은 집집마다 굴뚝 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는데, 이는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써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아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붙지 않도록 시설한 것입니다.
[고성 전통마을] 평민들이 살던 당호가 없는 한옥마을, 고성 왕곡마을
봉화 해저리 바래미마을
강바닥보다 낮아 바다였다는 뜻의 '해저', 옛날에는 '파라미'라고 기록되어 있는 마을입니다.
안희고택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가 살던 집이며,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집의 평면 구조는 ㅁ자형의 정침인 안채의, 안채 동쪽 모서리 부분에 ㄱ자형 사랑채를 연결하고 앞으로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김건영 가옥, 영규헌, 단사정 등을 관람하면 되고, 송천서원은 2007년 반천서원, 백두리사 등 3개 서원을 한 곳에 통합 복원하여 송록서원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양 주실마을
기묘사화가 일어난 후 한양을 떠나 마을로 온 호은 조전이 1630년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였고 이후 한양 조씨의 씨족마을로 형성된 곳입니다.
마을 입구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조성된 '주실쑤'라는 울창한 숲이 있고,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마을 형태는 배 형상을 띄고 있다고 하여 마을 안에는 되도록 우물을 만들지 않았는데, 배에 구멍을 뚫으면 가라앉게 되는 것처럼 액운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마을 내 우물은 한 곳에만 있으며, 주민들은 50여리 떨어진 곳에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하고 있다네요.
건축물은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이 있는데, 17세기말 처음 세워진 것으로 경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가옥 형태인 자형 구조 가옥이며, 오른쪽으로는 월록서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대표 건축물인 옥천종택은 1694년 처음 지어졌으며 경북 북부지방의 폐쇄적인 자형가옥 형태로 뒤에는 창주정사라는 문중의 서원 역할을 했던 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동 내앞마을
의성 김씨 청계파의 동성마을로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 앞의 마을이라 해서 천전, 내앞 마을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보물 제450호인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은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구조로 대문채와 사랑채가 서쪽으로 다시 한번 감싸 안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일반적인 대문채와 달리 바깥 담장에는 대문이 없는데, 대신 입구에 담장을 쌓지 않고 빈 공간을 두어 이 부분이 대문 역할을 합니다.
안동 귀봉종택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보물 제484호인 운천 호종일기가 보관되어 있답니다.
안동 천전리 추파고택, 보물 제1221호인 청계 김진영정, 백하구려, 안동 제산종택, 경치헌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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