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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기념관을 통해 알아본 율곡 이이의 업적과 생애 (in 율곡선생유적지)

by 휴식같은 친구 2020.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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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기념관을 통해 알아본 율곡 이이의 업적과 생애 (in 율곡선생유적지)

 

 

율곡 이이에 대해서 알마나 알고 계신가요?
저는 학교 국사시간에 배운 이기론을 주장하던 대학자,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정도의 얕은 지식만 갖고 있었습니다.

이번 파주여행은 율곡 이이의 발자취를 찾는 여행이었던 만큼, 율곡 이이선생의 생과 업적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파주 이이 유적이 있는 율곡선생 유적지, 율곡기념관에서 자세히 공부할 수 있었는데, 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율곡선생유적지의 자운서원과 이이 가족묘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파주 가볼만한 곳, 율곡선생 유적지 - 자운서원

 

 

율곡기념관은 율곡선생유적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율곡기념관율곡선생 관련 자료전시 및 체험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공간은 1층은 율곡 이이를 체험할 수 있는 뜻 세우기, 율곡 이이 되어보기 등으로 구성돼있고, 2층은 율곡선생 유적지의 모형도를 만들어 놓고 있고, 율곡 선생의 일대기와 업적, 가족 소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곡기념관은 율곡선생유적지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면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고, 입장 가능시간은 09:00~17:00(동절기엔 16:10까지)입니다.

 

구도장원공
율곡은 9차례의 과거에 급제, 그것도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렸습니다.

정말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영특한 사람이었나 봅니다.ㅎㅎ

 

대학자로 알려진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개혁자이기도 하는데요.

당시 조선은 건국된 지 200년이 지나 초심을 잃고 여러 폐단들이 있었는데, 다시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워 개국 토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경장론을 주장했습니다.

 

자운서원에 있는 문성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구현해 놓은 곳입니다.

기호학파, 조선시대 율곡 이이의 학설을 따르던 성리학자들을 말하며, 율곡학파라고도 불립니다.

대부분 기호지방(경기, 충청일원)에 거주하여 기호학파라 불렸습니다.

 

반면, 영남학파의 종주인 퇴계 이황은 예안의 도산서원을 근거지로 후학을 양성했는데 영남지방에 있어서 영남학파로 불렸습니다.

 

숙종대에 이르며 기호학파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송시열 계열의 노론, 이산을 중심으로 한 윤증 계열은 소론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기호학파는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송익필, 김장생, 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예학은 현종대에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을 일으키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국사시험에 자주 나오는 역사들인데 어렵게만 생각되었던 부분들이네요. ㅎㅎ ㅜㅜ

 

율곡의 생애와 관련된 곳은 크게 서울, 파주, 해주, 강릉입니다.

 

서울은 벼슬살이할 때의 공간 

해주는 처가의 고향으로 대장간을 차려 호미를 만들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던 시절

강릉은 외가이면서 출생지로 유년기를 보낸 곳 

파주는 조상이 모셔진 아버지의 고향이고, 자주 온거하면서 살았던 곳입니다.

 

김장생은 율곡의 수제자로 그의 학통을 계승하고, 이색,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했던 학자입니다.

 

화석정은 율곡이 가끔 머물던 정자인데, 민간설화가 내려오는 곳입니다.

율곡은 전란이 일어나면 반드시 선조가 임진나루를 이용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평소에 화석정에 단단히 기름칠을 해 두었다고 합니다.

 

율곡이 세상을 떠난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한양을 빠져나온 선조는 임진나루를 지나치게 됩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뱃길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백사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불을 밝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미래의 국난을 예견하고 화석정에 기름칠을 해둔 이이의 선견지명이 선조의 피난을 도운 셈이 되었습니다.

 

자운서원의 서재인 수양재, 유생들이 거주하던 기숙사 서쪽

 

2층으로 올라가면 율곡 이이의 일대기와 가족사, 그의 업적을 볼 수 있습니다.

 

율곡은 조선조 16세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1536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이이의 호 율곡은 그의 유년시절, 아버지 이원수의 고향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율곡의 가계도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셋째로 태어난 이이

한 집안에서 우리나라 화폐 인물로 두 모자가 나타나는 대단한 집안입니다.

 

예술을 사랑한 가족


규방에서 예술을 피운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은 이매창(1529~1592)

선산의 사절, 옥산 이우

 

1536년 12월 26일, 강릉 오죽헌 외가에서 셋째로 태어남

1538년 3세, 말과 글을 배움

 

1540년 5세, 어머니 사임당이 병들자 사당에 들어가 쾌유를 기원함

1541년 6세,  한양의 본가로 돌아와 이듬해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

1543년 8세, 본가인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음

1548년 10세, 강릉 외가에서 경포대부를 지음

1548년 13세, 진사초시에 장원급제

 

1551년 16세, 어머니 사임당이 별세, 시묘살이를 하며 불교에 몰두

1553년 18세, 시묘살이 끝내고 관례(성인식)을 행함

1554년 19세,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철학 연구, 이듬해 강릉 외가에서 유학연구

1555년 20세, 외가에서 자경문을 지음

1556년 21세, 한양으로 돌아와 한성시 장원급제

1557년 22세,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노씨와 혼사

1558년 23세, 경상도 예안에서 이황을 만나고, 편지로 학문토론

 

1561년 26세, 아버지 세상을 떠남

1564년 29세, 생원시 장원급제

1569년 33세, 관직에서 물러나고 선조의 부름으로 호당에 들어가 동호문답을 지어 임금께 올림

 

 

1570년 35세, 관직에서 물라나 해주에서 이황의 죽음을 들음

1571년 36세, 청주목사 부임, 서원향약을 실시

1572년 37세, 관직에서 물러나 파주 율곡촌으로 이주

1575년 40세, 홍문관 부제학, 성학집요 지어서 올림

1576년 41세, 관직에서 물러나 율곡리로 돌아감

1578년 43세, 해주에서 은병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양성

 

1581년 46세, 예문관 대제학, 경연일기 완성

1583년 48세, 병조판서, 시무육조를 올리고 10만양병설 올렸으나 묵살당함

1544년 49세, 육조병략을 짓고 숨을 거둠

1624년, 문성이라는 시호를 받음

 

이이의 학문은 이기론으로 이황의 주리론과 비교되어 주로 알아왔습니다.

 

퇴계 이황은 평생 관직을 멀리하고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바친 학자이며 교육자였습니다.

그는 기보다 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주리론을 주장했습니다.

경제보다 윤리, 현실보다 이상, 물질보다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긴 사상입니다.

 

율곡 이이는 관직에 나가면서도 학문에 정진한 유학파였습니다.

그는 이의 가치와 기의 가치는 함께 중요하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이와 기로 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나라와 백성애 대한 근심걱정을 많이 했고, 백성이 잘 살기 위해 끊임없이 개혁하고 대책을 임금께 제시하였습니다.

 

성리학은 이기론을 이용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학문입니다.

 

주리론과 이기론을 주장했던 퇴계와 율곡은 35년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존중하며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퇴계는 58세, 율곡은 23세, 짧은 만남이었지만 퇴계는 율곡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알려졌습니다.

 

2층 전시관 모습

 

'천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기를 근본으로 삼는다.'

 

율곡이 40세 되던 해(1575, 선조 8) 9월 성학집요를 편찬해 왕에게 올린 저술로 유학의 가르침을 통해 올바른 사람이 되고 나아가 가정, 사회, 국가를 평안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부터 소통을 말해왔던 학자이자 정치가였습니다.

백성을 으뜸으로 내세우는 민본덕치, 언로를 활짝 여는 여론정치, 때에 따라 법과 제도를 바꾸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울러 붕당의 폐해를 걱정하며 현실을 바꾸려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백성을 편하게 하고, 위를 덜아 아래에 더하고, 양민과 교민의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조선건국 200년이 지나 시국이 어수선할 때 국가 안위를 위한 6가지 병무인 시무육조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임현능(어진 자와 능력있는 자 임용), 양군민(군민 양성), 족재용(재용을 넉넉히 할 것), 고번병(변방 경비를 굳건히 할 것), 비전마(전마를 준비할 것), 명교화(교화를 밝힐 것)

 

하지만, 율곡이 제시한 시무육조는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같은 해 율곡은 양병십만론을 주장하였습니다.

10만의 군인을 양성해야 하는 이유, 병사 양성방법, 활용방법까지 대비책을 실제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전쟁이 질 것이라고 하였죠.

 

하지만 붕당의 파벌싸움에 빠진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율곡의 사후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치욕의 역사를 겪은 후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율곡 이이의 시무육조와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였다면 왜군을 물리쳐 임진왜란의 태풍에 빨려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많은 희생과 문화재 약탈과 방화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을 생각해보면 율곡의 선견지명에 존경과 당시 정치인들에게 야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평화스러운데 16세기 후반의 조선을 생각하면 정말 격동의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가 지난 이야기라지만,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ㅎㅎ

 

 

국사책에서 암기용으로 공부만 하던 시절, 역사의 한 위인으로만 치부하던 율곡 이이가 이렇게 대단한 분이라는 걸 제대로 공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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