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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운현궁 나들이, 운현궁 유물전시관

by 해피이즈나우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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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나들이, 운현궁 유물전시관

 

 

운현궁고종이 태어나서 12살까지 살았던 잠저이고, 아버지 흥선대원군인 이하응의 사저인 곳입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10여 년간 섭정을 펼치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을 휘둘리며 작은 궁궐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곳입니다.

 

운현궁 봄 풍경, 명성황후의 흔적 찾기

운현궁 가을산책

 

회사 근처에 있어서 가끔 방문하는 곳인데 이번엔 운현궁 내에 있는 운현궁 유물전시관의 전시내용을 담았습니다. 

고종과 흥선대원군,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와 운현궁의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위의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운현궁 관람안내

관람시간 4월 ~10월은 09:00 ~ 19:00, 동절기에는 09:00 ~ 18:00
휴무일(휴관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정상 개장
관람료(입장료) 무료

주차장 없음

 

운현궁에는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 등 크게 세 개의 건물이 있습니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의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당으로 쓰였던 곳이고요.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건물이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치른 곳입니다.

 

 

그리고 이로당 운현궁의 안채로 쓰인 건물로서 ‘이로’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앞쪽에 자리한 노안당과 노락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 6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운현궁 전각들을 관람하고 나오면 운현궁 유물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운현궁 유물전시관은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 후기 사회상을 알 수 있도록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을 전시한 공간입니다.

 

 

고종 초기 국내외 사건을 비교한 연대표와 운현궁 모형, 왕과 왕비의 가례를 올릴 때 착용한 예복, 대원군 교의, 척화비, 당백전, 운현궁의 각종 생활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들은 모두 복제품이고, 실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되거나 전시하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초상화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기의 연대표로 주로 1800년대 동서양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가 순서대로 비교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습니다.

 

1852년 고종 출생,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집정이 시작되었고, 1866년의 병인박해, 1871년 신미양요로 척화비 건립, 1875년 운현궁으로 돌아왔으며 다음 해 운요호사건 발생, 1976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했고, 1898년 흥선대원군이 사망했습니다.

 

운현궁 배치도 

입구에 수직사가 있고, 차례로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이 있으며, 유물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당시엔 이보다 훨씬 큰 면적으로 사저가 있었다고 합니다.

 

운현궁 유물전시관 모습

매우 작은 공간에 알차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운현궁의 생활유물

목가구와 목공예품, 금속유물들, 서화류, 전적류, 복식류, 도자기류 등 6200여 점에 달한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시서화에 능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좌)의 고종 가례식 의복과 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우)의 가례식 복식입니다.

 

교지함과 나전칠기 함, 그리고 쟁반

 

개항과 외세의 침략

1876년(고종 13)에 개항한 조선은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히 편입되었으며,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73년에 실각한 이래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며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개항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청국과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게도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한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여년 간 섭정을 했습니다.

 

대원군 집정 후 세도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백성을 침탈하는 서원을 철폐했고,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는 등 민심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왕권강화를 위해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해 원납전과 당백전 징수로 국가재정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대외적으로 쇄국양이 정책을 펼쳤으며 이로 인해 천주교 탄압, 그에 따른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 미국 아시아함대가 침입한 신미양요가 발생하는 등 극심한 개항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대원군은 두 번의 외세 대결과 남연군묘 도굴사건으로 척화비를 세우는 등 통상거부정책을 강력히 추진했으나 계속되는 항쟁과 지배층 내 보수 유생의 비판으로 정권에서 물러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조선후기 사회변동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의 정책들

 

정이품대부송

고종이 어릴 때 오르던 소나무로 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간 후 소나무가 그리워 정이품 금관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가례 올릴 당시의 명성황후 재현 모습

 

운현궁 구경하실 때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당시의 조선후기 시대상을 이해하기에 적당한 전시관이니 함께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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