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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4.19민주묘지] 4.19 혁명과 4.19 혁명기념관

by 해피이즈나우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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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4.19 민주묘지] 4.19 혁명과 4.19 혁명기념관

 

 

국립 4.19 민주묘지는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자유당 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부정과 부패, 족재권력과 싸운 4.19 혁명 때 희생당한 영령들을 모신 묘지입니다.

4.19 혁명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가져온 최초의 독재에 저항한 민주주의 운동입니다.

 

4.19 혁명과 국립 4.19 민주묘지

 

국립 4.19 민주묘지 일대를 둘러보고 한쪽에 있는 4.19 혁명기념관경했는데요.

4.19혁명기념관은 4.19혁명의 전개과정과 독재에 저항해 일궈낸 민주주의와 4.19 혁명이 국제사회에 미친 형향까지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습니다.

 

4.19 혁명 기념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동절기 09:30~16:30, 하절기 09:30~17:30

휴관일(휴무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그 다음날)

관람료(입장료) 무료

주차장 주차요금 무료

 

 

 

국립 4.19 민주묘지는 1961년 공원묘지 설립을 결의하여 1963년에 묘지를 준공하고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 성역화 사업을 거치고 국립묘지로 승격했고, 1997년 4월에 4.19 혁명기념관이 들어섰습니다.

 

4.19혁명기념관은 전시안내

1층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난 격동의 역사를 조명하고,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고, 2층에서는 4.19 혁명의 흔적과 영향에 대해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4.19 혁명기념관 입구에는 당시 희생당한 영령들의 사진이 전시된 정의의 불꽃 공간입니다.

 

1층 전시관, '그들의 몸짓, 소리 그리고 바람' 전시 

 

일본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면서 광복을 맞이했고, 1947년 UN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 수립을 결의했으나 북한과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었습니다.

 

남한 단독으로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정부수립 초기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부 친일파들이 관료나 군인, 경찰로 등용되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48년 9월 9일 공산정권을 수립한 후 1949년 5월 우리 관할하의 개성을 기습공격, 여수와 순천에서 게릴라 공습을 감행하는 등 지속적인 도발을 남침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였고 결국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3년 여의 전쟁으로 국토는 완전히 폐허 되었습니다.

 

4.19 혁명이 일어난 시대적 상황 - 광복과 전쟁, 그리고 독재정치

 

1852년에 이승만의 독재를 막기 위해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을 시도했으나 부결되자 이승만은 5월 25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납치하며 직선제와 내각책임제를 섞은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52년 8월 5일, 1주일 만에 후보등록, 10일 만에 제2대 정부통령 직선제 선거를 치러 이승만은 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54년 7월 27일, 휴전협정,

19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의 압도적 승리,

 

1954년 11월 27일, 두 번의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이 헌법 상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게 되자 자유당은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을 제출했으나 1표가 미달돼 부결되자 이틀 후 사사오입이란 이상한 논리를 세워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습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신익희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승만과 이기붕이 각각 당선되었고,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 총선거,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경위권을 발동해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 통과(2.4 보안법 파동)

1959년 1월 22일, 자유당 비호하에 반공청년단을 결성하여 깡패를 동원해 반정부 인사를 테러했으며,

1959년 4월 30일, 야당성과 반독재노선을 분명히 한 경향신문을 강제 폐간시켰고,

1959년 7월 31일, 제3대 대통령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216만여표를 득표했던 조봉암을 공산당으로 몰아 사형시켰습니다.

 

한국전쟁 후 정치, 경제, 사회

 

정치는 반민주주의로 인해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으로 반공정책은 민심이 이반됐고, 권력기반이 약화됐습니다.

경제는 불안전한 농지개혁, 귀속재산 불하, 미국의 원조 등에 의존하면서 정경유착, 부정부패, 경제질서 파괴, 빈부격차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회는 전쟁 이후 실업자가 폭증했고, 농촌경제가 파탄나서 도시로 집중하게 되고, 500만 피난민은 생활기반이 부족한 현실이었습니다.

 

2.28 대구학생의거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의 대구유세가 2월 28일 예정되어 잇었는데, 장유당 정권은 시민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대구지역 중고교생들을 시험,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을 핑계로 학교에 등교시켰습니다.

 

이에 학생들은 학생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며 시위를 했고, 3월 14일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3.15 부정선거

 

이승만 정권은 선거승리가 불리해지자 12년간 계속된 장기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선거조작을 계획했습니다.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 신병치료차 갔다가 사망하자 4선의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켜 85세인 이승만이 사망하면 모든 권력을 물려주기 위해 공무원 통동원해 선거운동망을 조직했는데요.

40% 사전투표 및 투표함 바꿔치기, 유권자 명부 조작과 대리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깡패를 동원해 유권자 협박 등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으며, 당시 이기붕이 100% 가까이 나오자 득표수를 줄여 발표까지 했습니다.

(이승만 963만표 85%, 이기붕 833만표 73%)

 

3.15 마산의거

 

마산시민과 학생들은 3.15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선거무효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했으나, 이를 강제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은 무자비하게 총을 쏴 10여명이 사망하고 87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때 실종됐던 16세 김주열 군이 4월 11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자 2차 시위가 벌렸습니다.

이때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욱 확대됐고, 이승만 정권은 12일 전국에 등교 중지령을 내리고 공산계열의 책동으로 몰아갔습니다.

 

4.18 고려대 학생시위 및 피습

 

4월 18일 3000여명의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 앞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고, 시위에서 잡힌 학생들이 풀려나서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시민과 고교생들이 뒤따랐습니다.

이때 정치깡패 반공청년단의 습격을 받아 200여명이 다치고 정부는 더욱 강경하게 진압했습니다.

이 사건이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고대 학생들 피습소식이 전해지자 4월 19일,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민들이 '부정선거 다시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며 서울시내를 누볐고, 10만여명으로 늘어나며 경무대로 향했습니다.

 

이때 경찰은 총을 쏴 21명이 희생당했고, 시위는 인천, 수원, 부산, 광주 등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이승만은 비상계엄령을 내렸습니다.

 

이날 전국적으로 시위대와 경찰 115명이 사망하고 72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국무위원과 부통령이 사표를 냈고,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했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만 내려놓겠다고 했습니다.

 

4월 25일 교수단 시위

 

이승만 정권의 미온적인 태도에 국민들은 다시 분노했습니다.

전국 27개 대학 258명의 교수들은 종로에서 시위하며 국회의사당에서 시국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교수단 시위가 끝났으나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는 밤새 진행되었으며, 교수단 시위는 소강상태에 빠졌던 4.19 혁명에 결정적이고도 새로운 활력이 되었습니다.

 

1960년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 이승만 하야 성명

 

4월 25일부터 이승만 정권퇴진을 강력히 요구했고, 이승만 동상은 철거되었습니다.

계엄과 사령관 송요찬 장군은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계엄군이 시위대에 발포 중지를 명령했습니다.

 

국회는 대통령 즉각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 내각책임제 개헌을 결의했고, 미국 대사와 각료들의 설득으로 이승만은 12년 만에 대통령에서 내려왔고 자유당 정권도 무너졌습니다.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는 새벽 경무대 비서동에서 육군소위였던 장남 이강석에 의해 이기붕을 포함한 가족들은 모조리 권총으로 살해되었고, 이상석 본인도 자살했습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날 아침에 미국 대사 맥카나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신청이 수락되었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장면 부통령마저 사임하자 외부무장관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고, 이승만은 5월 29일 미국으로 망명함으로써 4.19 혁명은 성공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각 지역에서의 4.19 혁명

 

2층 전시관, 그들을 기억하고 공감한다

 

4.19 혁명, 그날의 의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시작 구문)

 

4.19 정신을 4.19 민주이념으로 표현하고 있어 진리와 정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의미입니다.

 

아프지만 의로웠던 기억, 4.19 혁명의 증언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의 하야성명 발표 모습

이승만의 하야로 1960년 8월 13일 제2공화국이 탄생하였습니다.

 

4.19 혁명의 위대한 함성이 인정받기까지

 

4.19 혁명으로 1960년 8월 12일 제2공화국이 출범했으나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요.

박정희 스스로 4.19 혁명의 완성자라 했으나 독재자의 길을 걸으며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습니다.

 

1979년 유신체제가 무너지면서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는 듯했으나 12.12 쿠데타레 이어 5공화국이 등장하는 등 오랜 세월동안 4.19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4.19 혁명정신은 19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하였고, 의거에서 혁명으로 재정립되는 정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4.19 혁명이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

 

1950년대 터키(현 튀르키예)의 멘델레스 정권은 공업화 정책이라는 개발독재로 경제파탄을 초래하고 정치, 언론탄압을 일삼았는데요.

1960년 4월 28일 터키의 앙카라, 이스탄불 대학생들이 한국 학생을 본받자며 시위를 해 멘델레스의 철권정치의 막을 내리게 했습니다.

 

1960년 일본은 미일 안보조약 인준문제가 일부 반발에 부딪치자 자민당은 이를 변칙통과 시켰는데, 일본 대학생들은 한국 학생을 본받자며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해 1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아프지만 기억해야 하는 그들의 자취

 

세계 3대 시민혁명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포토존

 

명사방명록

 

옥상으로 올라가면 국립 4.19 민주묘지 전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4.19 혁명과 국립 4.19 민주묘지

 

 

이승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를 지켜낸 공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정치로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많은 국민을 죽인 과오를 용서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과와 오는 역사가 판단해 줄 것입니다.

지금도 진보와 보수진영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데요.

이승만 기념사업을 굳이 추진한다면, 후대에게 이승만의 공과 과오를 정확히 짚어주는 사업이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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