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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이야기]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상

by 해피이즈나우 2023.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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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이야기] 양화대교 북단에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상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고려후기 공민왕의 개혁세력으로 등장한 새로운 지배계층인 신진사대부로 문신이자 서예가였습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계획에 끝까지 거부하며 죽음을 당한 충신이었죠.

정몽주는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고려말 문신으로 이성계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당시 정도전과는 반대편에서 고려왕실을 지키려다가 1392년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인물입니다.

 

정몽주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학문, 외교, 경제, 군사, 정치, 인품 모든 면에서 특출 난 고려 말기의, 고려 최후의 보루였으며, 선비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양화대교 북단 서쪽에 포은 정몽주선생상이 있어 사진에 담고 포은 정몽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정몽주에 대한 생애를 이용함)

 

포은 정몽주 선생상

비 건립인은 영일 정씨 포은공파라고 합니다.

 

포은 정몽주는 1337년(고려 충숙왕 복위 6)에 경북 영천군 우학리에서 지추밀원사 종2품 벼슬을 한 정습명의 4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1357년 감시에 합격, 1360년 과거시험 문과에서 장원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관직들을 거쳤고, 재임 중에는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모셨습니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있을 때 배명 친원의 외교방침에 반대하다 언양으로 유배당했고,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규슈지방의 지방장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청하고 고려 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키기도 했습니다.

 

1388년 예문과 대제학, 문하 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이후 문하찬성사,  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로 익양군충의군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의 호를 받았습니다.

 

포은 정몽주선생상은 양화대교 북단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 내리는 양화대교 전망, 그리고 한강다리현황과 한강다리 개수

 

정몽주는 고려 말 혼란의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리 큰 일이나 의혹에도 사리에 맞게 처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어 출척을 엄격하게 하였으며, 도첨의사사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서울에는 오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기강을 정비하여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도태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며, 의창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을 설치하여 조운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때 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기회를 보아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마침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벽란도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먼저 이성계의 우익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이방원이 부친 이성계에게 위급을 고하여 그날 밤에 병을 무릅쓰고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제거할 계획을 꾸몄습니다.

이를 눈치채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정몽주가 피살되기 전,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시를 적어 보냈는데요.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 이방원의  '하여가'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정몽주의 '단심가' -

 

정몽주 선생 묘는 용인시 모현읍 능원리에 있는데요.

 

원래 피살된 후 개성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1406년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면례행렬이 지금의 용인시 수지읍 경계에 이르렀을 때 앞에 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현재 위치에 떨어져 지금의 자리로 옮겨 부인과 함께 합장했다고 합니다.

묘비는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고려수문하시중정몽주지묘'라고 쓰여있습니다.

 

 

 

사후인 1405년 권근이 요청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되었고, 

1517년 태학생 등의 상서에 의해 문묘에 배향하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그들이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 영천의 임고서원 등 몇 곳의 서원에는 정몽주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정몽주의 저서로는 '포은시집, 해행총재, 신편포은선생집, 포은선생문집, 포은시고, 포은선생집매록, 포은집초' 등이 전하고 있고,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백원첩 포은선생유상첩'에서 필적을 볼 수 있습니다.

문집에 글씨에 관한 시가 남아 있는데요.

'근역서휘'에 실린 해서는 필획이 단정하고 엄격하여 굳은 절개와 의지가 엿보이는 웅강한 서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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