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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서울 선릉과 정릉(선정릉) 원찰, 봉은사

by 해피이즈나우 2023.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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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선릉과 정릉(선정릉) 원찰, 봉은사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과 정릉(선정릉)에 들렀다가 선정릉의 원찰인 봉은사에 들렀습니다.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11대 임금 중종의 조선왕릉, 선릉과 정릉(선정릉)

 

왕릉의 원찰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것으로 조선시대에도 왕릉에 모신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호사찰을 두었으며, 선정릉의 원찰이 바로 삼성동의 봉은사입니다.

 

1495년(연산군 1) 성종의 선릉을 만들 때 봉은사(이전 이름 견성사)에서 성종의 명복을 빌면서 인연이 되어 원찰이 되었는데요.

성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성종의 비 정현왕후가 성종의 재를 봉은사의 옛 이름인 견성사에서 지냈고, 1498년에 견성사를 선릉 동쪽으로 옮기며  봉은사라 칭했습니다.

이후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가 주도하여 중종의 정릉이 선릉 동쪽으로 옮겨오자 봉은사는 선릉과 정릉의 연찰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정릉의 원찰이었던 서울의 도심 속 사찰, 봉은사 풍경과 봉은사 주차장 정보를 담았습니다.

 

강남구 삼성동 도심 속에 자리한 봉은사는 대한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입니다.

 

794년(원성왕 10) 신라시대 연회국사가 창건하여 견성사라고 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1498년(연산군 4)에 정현왕후가 선릉을 위하여 사찰을 중창하였습니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가 주도하여 견성사 터가 명당이라 하여  수도산 아래로 옮겼고 사찰의 명칭을 봉은사로 개칭하였습니다.

 

 

 

중종 때는 이곳에서 승과시를 치르던 곳이며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두 대사도 여기서 등과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임진왜란 때 화를 입고 다시 복원되었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불탄 것을 숙종 때 중건하고 1825년(순조 25)에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대부분의 전각들이 파괴되었으며 이후에 재건하였는데요.

병자호란 당시 피난을 가던 많은 사람들이 한강에 빠져 익사하였는데 그들의 혼을 위로하는 수륙재가 봉은사에서 열렸으며 현재도 매년 윤달에 수륙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봉은사 주차장

주차요금은 최초 30분은 무료, 30분~ 1시간은 3,000원, 이후 추가요금 10분당 500원입니다.

 

 

 

주차장 안쪽에는 향적원과 보우당이 있는데요.

 

향적원은 400여명이 동시에 식사가 가능한 공양간이고요.

 

보우당은 2000년 10월 아셈(ASEM) 정상회의를 위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사하촌을 정리하고 건립한 건물로 보우대사의 불교 중흥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보우당이라 하였습니다.
각종 교육 및 신행활동 공간으로 상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요일에는 어린이 법회가 진행되고 있고, 지하층엔 무의탁자나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무료진료소와 종무원 숙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봉은사 일주문인 진여문

진여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의미하며, 진여문을 들어간다는 것은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봉은사는 우리나라 선종불교의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법왕루, 북극보전, 선불당, 천왕문, 일주문 등의 당우가 있습니다.

 

철종 때 승려 영기와 남호가 조각한 화엄경 81권, 금강경, 유마경 등 불경판 13종, 3,479장이 보존되어 있는데요.

이들 경판이 보관된 전각이 판전인데 판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사망하기 3일전에 쓴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보물 제321호로 지정된 지정4년고려청동루은향로는 동국대학 박물관에서 보존하고 있는데, 이 향로는 사명대사가 사용하던 것이라고 합니다.

홍무 25년 장흥사명동종은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종은 1392년에 주조된 종으로 원래 장흥사에 있던 것을 봉은사로 옮겨온 것이라 합니다.

 

봉은사 법왕루

 

문자 그대로 법의 왕, 즉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하며 대웅전과 마주하여 누각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법왕루는 사시예불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대법회와 기도, 수행 등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법왕루에서 바라본 삼성동 코엑스와 무역센터, 특급호텔 등 고층건물들

지금은 1230년이나 된 사찰이 강남 도심 속에 있어 도심 속 휴식처 같은 사찰이 되었습니다.

 

봉은사 대웅전

대웅전은 1982년 새롭게 중창되었으며, 항상 이루어져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신행 활동의 중심입니다.

 

봉은사 삼층석탑

 

대웅전 앞마당에 세워진 전형적인 3층 석탑으로서 부처님 사리 1과가 모셔져 있습니다.

아울러 대웅전(大雄展)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라고 합니다.

 

법당 안에는 2층 닫집을 짓고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로는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부처님 등 삼존불(보물 제1819호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모셨으며, 후불탱화는 삼여래회상도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앞 3층 석탑과 법왕루 모습

 

봉은사 선불당

 

봉은사는 1939년 4월 화재로 판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습니다. 

1941년 봉은사 주지 일초 태욱스님이 중창을 하면서 당시 심검당 자리에 현재의 선불당을 세웠습니다.

선불당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템플스테이하는 전통문화체험관

 

봉은사 지장전

 

지장전은 주불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입니다.

지장전은 2002년 6월 불의의 화재로 전소되어 본래 12평이었던 전각을 40평으로 중창하여 2003년 12월에 점안식을 가졌습니다.

 

봉은사 영산전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보처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양 옆으로 16아라한이 옹위하고 있으며 후불탱화와 16나한도, 신중탱화 등의 불화가 있습니다.

 영산전은 나한님을 모신 전각입니다.

 

법왕루와 나란히 있는 연회루

 

연회다원 찻집이 있는데, ‘연회다원’은 봉은사 창건주인 연회국사의 법호(연회)를 딴 전통차체험관으로 緣(인연 연), 會(모일 회) 뜻을 담고 있습니다.

 

 

 

불교문화와 차 문화의 우수성 알리고자 하는 취지와 의미를 두고 구 종루위치에 리모델링하여 2018년 6월 20일 개원했는데요.

영업시간은 09:30~21:00입니다.

 

봉은사 종루

종루에는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의 사물이 봉안되어 있으며, 새벽예불과 저녁예불을 시작할 때 사물을 치는 곳입니다.

 

봉은사 종각

종루 아래에 있으며, 1974년에 조성된 종각은 종루가 세워지면서 사용되지 않고 보존만 하고 있습니다.

 

봉은사 미륵전

미륵대불 앞에 위치하며 법왕루를 신축하면서 옛 법왕루를 그 모습 그대로 옮긴 전각이라고 합니다.

 

봉은사 미륵대불

 

미륵대불은 1986년 영암큰스님께서 발원하여 봉은사 사부대중이 모두 참여하여 1만 명 이상이 불사에 동참하여 1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대작불사로 1996년에 완공되어 봉은사 성보로써 높이 23m로 국내 최대의 크기의 부처님입니다.

 

 

 

현재 미륵전과 미륵부처님이 모셔진 광장은 신도들의 기도 장소이지만 경우에 따라 공연 등 문화 행사장으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봉은사 영각

 

영각에는 불단에 지장삼존불상과 탱화가 있고 벽면으로는 봉은사의 개산조인 연회국사를 비롯한 조선불교의 중흥조 보우대사와 서산, 사명, 남호 영기율사, 영암, 석주스님등 7분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으며 오른쪽 벽면으로는 6.25 전쟁 전후 희생된 201위 호국영가의 영단이 설치돼 있습니다.

 

1967년 7평으로 지어졌던 충령각을 1992년 두 배 규모로 증축하여 영각으로 개칭했습니다.

 

영각에서 바라본 봉은사 대웅전 등 전각들

 

봉은사 판전

 

판전은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며 1855년 남호 영기 스님과 추사 김정희 선생이 뜻을 모아 판각한 화엄경 소초 81권을 안치하기 위하여 지어진 전각입니다.

 

후에 다시 유마경, 한산시, 초발심자경문, 불족인 등을 더 판각하여 현재 3,438점의 판본을 보관하고 있으며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네요.

 

판전(板展)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인서화가 추사 김정희가 사망하기 3일 전에 쓴 글씨로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쓴 글씨입니다. 

 

김정희는 1852년(철종 3)에 북청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과천에 있는 과지초당에 머물면서 봉은사를 왕래하다가 1856년 10월 10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판의 글씨는 어리숙하면서도 굳센 필체가 느껴지는데, 전 자의 왼 삐침이 곧게 내려 누른 점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말미에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71살 과천 늙은이가 병중에 쓰다)이라고 낙관하였는데요.

果는 김정희가 과천에 머물던 때의 별호인 과로, 과옹을 의미합니다.

 

봉은사 약수터인 날물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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