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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조선왕릉] 서울 선릉과 정릉(선정릉) 역사문화관

by 해피이즈나우 202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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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서울 선릉과 정릉(선정릉) 역사문화관

 

 

오랜만에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과 정릉(선정릉)을 찾았습니다.

선릉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과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장현왕후의 동원이강릉이며, 정릉은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단릉인 조선왕릉입니다.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11대 임금 중종의 조선왕릉, 선릉과 정릉(선정릉)

 

서울 선릉과 정릉 입구에 선정릉 역사문화관이 있어서 관람했는데요.

성종과 중종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서울 선릉과 정릉 역사문화관

 

서울 선릉과 정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가장 도심에 위치한 왕릉입니다.

 

주변이 온통 빌딩 숲 가운데 있어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듯한 풍경인데요.

1970년대 강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선릉과 정릉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게 되어, 두 조선왕릉은 도심의 회색 숲 속에 있는 녹색의 섬처럼 남아 있는 형상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지속된 조선시대 역대 27명의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18개 지역에 40기, 73명의 무덤이 있습니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북한에 있는 2기의 조선왕릉은 제외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이야기

 

 

 

선릉 조선 9대 왕인 성종과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장현왕후의 동원이강릉이며, 정릉은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단릉인 조선왕릉입니다.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 곁에 묻었으나 1562년 중종의 정릉을 선릉의 동쪽으로 옮기면서 선릉과 정릉은 가까운 곳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선릉조선 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으로 1494년(성종 25)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현 선릉)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는데요.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성종의 비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선릉은 유독 수난을 많이 겪었는데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에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졌고,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 다음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습니다.

 

 

 

 

성종(1457~1494년, 재위 : 1469년~1494년)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1461년(세조 7)에 자산군, 숙부인 조선 8대 임금 예종이 1469년에 세상을 떠나자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에 친정을 시작하였는데요.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대에부터 편찬해 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습니다.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후 1494년(성종 25)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1462~1530년)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당시 정계에 떠오르던 아버지 윤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연산군 즉위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했으며, 1530년(중종 25)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고 합니다.

이후 연산군은 즉위 후 성 윤기견과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알면서 친어머니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으로 1544년(중종 2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45년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에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서 중종의 능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릉이 지대가 낮아 물에 잠기는 일이 잦으면서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의 태릉에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그 후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중종(1488~1544년, 재위 1506~1544년)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중종은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는데요.

새로운 개혁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하였으나,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544년(중종 39)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종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정릉엔 홀로 있는데요.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1487~1557)는 대군 시절 혼인하여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왕비가 되었으나 7일 만에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두 번째 왕비는 장경왕후 윤씨(1491~1506)로 후궁이었다가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1515년 훗날 12대 왕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 번째 왕비는 문정황후 윤씨(1501~1565)로 1517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534년에 경원대군(훗날 13대 임금 명종)을 낳았고, 1565년(명종 20)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종은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홀로 정릉에 남게 된 이유입니다.

 

성종과 중종의 가계도

 

연산군과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성종의 두 번째 왕비로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 척 번째 비 공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1476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해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을 낳았으나 투기가 심해 1479년에 폐위, 3년 뒤에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산군은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 10대 임금이 되었습니다.

이후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을 알게 되면서 폭정을 한 끝에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결국 중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연산군은 1506년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릉과 정릉의 원찰, 봉은사

 

고려시대의 원찰을 계승하여 조선시대에도 왕릉에 모신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호사찰을 두었으며, 선정릉의 원찰은 삼성동의 봉은사입니다.

1495년(연산군 1) 성종의 선릉을 만들 때 봉은사(이전 이름 견성사)에서 성종의 명복을 빌면서 인연이 되어 원찰이 되었는데요.

 

당시 대신들은 사찰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현왕후가 성종의 재를 지내게 했고, 1498년에 견성사를 선릉 동쪽으로 옮기며 절을 크게 짓고 봉은사라 하였습니다.

이후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가 주도하여 중종의 정릉이 선릉 동쪽으로 옮겨오자 봉은사는 선릉과 정릉의 연찰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선릉과 정릉(선정릉) 원찰, 봉은사

 

조선왕릉 분포도

 

조선왕릉 이야기는 아래 글들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왕릉 총정리 (분포, 구성, 관람안내)

조선왕릉과 조선왕 계보(조선왕 순서)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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