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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인천시 여행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 덕포진

by 해피이즈나우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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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 덕포진

 

 

김포 덕포진은 강화도 초지진, 덕진진과 함께 강화해협을 통해 수도 서울로 진입하려는 외세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설치한 군영인데요.

병자호란 이후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5개의 진과 7개의 보, 52개의 돈대 중 하나입니다.

 

덕포진 설치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666년(현종 7)에 이미 강화에 예속된 진이었으니 그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 때에는 미국 함대와 싸웠던 격전지였습니다.

 

서울과 경기에는 아직 봄소식이 없지만, 날씨만큼은 봄이 다가옴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요.

지난 주말 늦은 오후에 산책하기 좋은 곳,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격전지인 김포 덕포진을 찾았습니다.

3년 전에 방문한 후 다시 찾았네요.

 

덕포진은 김포시 대곶면의 대명항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덕포진은 1679년(숙종 5) 강화도의 광성, 덕진, 용두의 여러 돈대와 함께 이곳에 돈대가 축성되었습니다.

한강과 연결되는 강화해협은 조선시대 외세침입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으며, 강화도와 김포를 따라 촘촘하게 늘어진 진, 보, 돈대가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식량 부족으로 50일도 버티지 못하고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는데요.

 

이때 강화도로 피신할 수 있었다면 삼전도의 치욕과 백성들의 고통을 막았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강화해협은 외세의 접근이 수월하지 않았었고, 천혜의 방어를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덕포진 관람안내

 

관람시간 제한없음

관람료(입장료) 무료

휴무일 없음

주차장 무료

소요시간 40여분(왕복)

 

덕포진 안내도

덕포진은 강화해협 중에서도 가장 폭이 좁은 용두돈대와 마주하고 있으며, 이곳을 손돌목이라 부릅니다.

 

덕포진 진지를 따라 1.5km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요.

돈대와 포대(3곳), 파수청이 있고 손돌 묘가 있습니다.

 

덕포진 전시관

김포의 역사,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조선시대 외세의 침입에 대한항 역사적 기록, 덕포진 발굴기록, 손돌 이야기 등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덕포진전시관 관람시간이 09:00~18:00이며, 휴무일은 설과 추석 당일에 휴관하고, 관람료는 무료입니다.

 

덕포진 야외학습장

 

작은 구름에 걸린 해

 

강화해협 건너 바로 맞은편에는 덕진진과 덕진돈대가 있습니다.

 

[강화도 여행] 덕진진 (덕진돈대, 남장포대)

 

덕포진에 있는 포대는 3곳이 있습니다.

차례대로 가포대, 나포대, 다포대 순으로 이어져 있으며, 위 사진은 첫 포대인 덕포진 '가' 포대 모습입니다.

 

덕포진 '가' 포대는 7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고, 강화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강화도 여행] 초지진 / 초지돈대

[강화도 여행] 덕진진 (덕진돈대, 남장포대)

 

1980년 발굴 당시 중포 2문이 발견되었는데요.

포에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포의 무게, 화약의 용량과 함께 고종 11년(1874)에 운현궁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남쪽 해안을 따라가면 대명항이 있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덕포진 나, 다포대와 손돌묘, 파수청 터가 있습니다.

 

대명항 방면

 

덕포진 포대 아래에는 논이 있습니다.

철새들이 많았는데 이번엔 조용하네요.

 

덕포진 '나' 포대

나포대는 5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고, 가포대와 같이 초지진과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1980년 발굴 당시 5번째 포대에서 고종 11년(1874)에 만들어진 소포 2문과 중포 1문이 발견됐습니다.

 

덕포진 나포대 모습

 

평화로운 들판

 

덕포진 '다' 포대

다포대는 3개의 포대로 이루어져 있고, 덕진진의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다포대는 덕포진의 다른 포대와 다르게 지붕이 기와로 되어 있는데, 발견된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1980년 발굴 당시 고종 11년(1874)에 만들어진 중포 1문이 발견됐습니다.

 

덕포진 파수청과 손돌 묘, 덕포진 돈대가 보입니다.

 

덕포진 파수청 터

지금은 파수청 복원공사를 하고 있어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1980년 포대 ·돈대 및 파수청 터의 발굴조사에서 1874년에 만든 포와 포탄, 조선시대의 화폐인 상평통보 및 주춧돌과 화덕 등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파수청은 유구로 보아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면 강화해협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곳이 덕포진 덕포진 돈대 터와 손돌 묘가 있습니다.

 

손돌 묘

 

덕포진 아래 강화해협의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 부르며, 이곳엔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던 고종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해 초지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이때 손돌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뒤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몽고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을 죽이자 적이 뒤따라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결국 무사히 강을 건넌 왕은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고 지금의 자리에 손돌의 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 뱃길목은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손돌의 기일(음력 10월 20일)이 되면 그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여 '손돌바람'이라 부르고, 이때 바람과 함께 오는 추위를 '손돌추위'라 합니다.

 

원래 이곳 손돌 묘에는 손돌을 모시던 사당이 있어 제사도 모셨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제사도 중단되었습니다.

그 후 1970년에 주민들이 손돌 묘를 세우고 다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1989년부터는 김포문화원에서 음 10월 20일에 진혼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광성보의 용두돈대

 

그 앞 물길이 손돌목이고요.

용두돈대 위쪽에 광성보에 있는 손돌목돈대가 있습니다.

 

[강화도 여행] 광성보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덕포진 덕포돈대 터

지금은 군 초소가 전망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덕포진 돈대에서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미국 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였습니다.

 

광성보와 멀리 문수산, 우측엔 부래도가 보입니다.

 

광성보 앞은 강화해협 중에서 폭이 가장 좁고 물살이 가장 거센 지역입니다.

손돌목은 실제 보기에도 물살이 무척 빨라 보이고, 조선시대에는 조운선 100여척이 침몰한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남쪽으로는 멀리 초지대교, 초지진, 남장포대, 길상산, 덕진진, 정족산, 마니산 순으로 보입니다.

 

덕포진은 주차장에서 1.5km 구간을 걸으며 강화해협과 덕포진 포대 등을 구경하면서 산책하기 좋은 곳입니다.

이제 포근한 봄이 오니 가족나들이로 다녀와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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