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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권 여행

김인문 묘/김양 묘 그리고 서악동 귀부

by 해피이즈나우 2019.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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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 묘/김양 묘 그리고 서악동 귀부

 

 

태종무열왕릉 길 맞은편 아래에는 김인문 묘와 김양 묘가 나란히 있고, 서악동 귀부가 있습니다.

 

태종무열왕릉과 태종무열왕릉비, 서악동 고분군은 입장료와 입장시간 제한이 있는데 비해 김인문 묘와 김양 묘는 항상 오픈되어 있어서 언제든 관람이 가능합니다.

 

[경주여행]태종무열왕릉과 경주서악리(동) 고분군 

 

무열왕인 김춘추는 자신부터 아들 문무왕, 손자 신문왕, 증손자 효소왕과 성덕왕, 5대 효성왕과 경덕왕, 6대 혜공왕까지 이어지는데 쓰러져 가는 집안을 세워 자체로 입신양명의 대명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김인문 묘와 김양 묘, 그리고 서악동 귀부를 구경해 보겠습니다.

 

태종무열왕릉 입구에서 바라 본  김인문묘(좌)와 김양묘(우) 모습

더운 날씨라 이쪽 관람객은 많지가 않더군요.

 

이곳 두 개의 묘의 주인공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인문무열왕의 9세손인 김양의 묘입니다.

왕릉 못지 않게 고대 신라시대에는 큰 묘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열왕릉 동쪽 평지에 위치하는 이 무덤은 김인문(629~694)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이자, 문무대왕의 친동생이죠.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데 이바지하게 됩니다.

 

당나라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효소왕 때 세상을 떠나자 태대각이라는 관적을 추증하고 서라벌의 서쪽 언덕에 장사하였습니다.

 

 

김인문은 66년 중 22년을 당나라에서 살아서 당나라 신하들과의 친분으로 외교의 달인이라고 칭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그는 전쟁의 성패를 가름할 결정적인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삼국통일 후 당나라와의 싸움으로 번졌는데요.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낀 김인문은 두 나라의 오해를 사는 일로 곤혹을 치르지만 슬기롭게 극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양(808~857) 묘 모습

 

김인문묘와 나란히 위치한 무덤인데요.

김양은 무열왕의 9세손으로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에 공헌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무왕이 된 김우징을 도와 민애왕의 뒤를 잇게 하고, 다음 왕인 문성왕도 받들었습니다.

그 후 헌안왕 때 김양이 세상을 떠나자 대각간을 추증하고 무열왕릉 곁에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

 

김인문 묘 앞에는 경주 서악동 귀부(보물 제70호)가 있습니다.

 

이 거북 모양의 받침돌은 김인문의 묘비를 세웠던 곳인데,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비슷한 양식으로 네 발로 힘 있게 나아가면서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습니다.

 

앞 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다섯 개인 것이 다를 분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릉비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 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습니다.

 

거북의 등에 새긴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것과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 놓은 듯한 무늬를 돌렸습니다.

 

 

비의 몸돌과 머릿돌은 없어졌는데 1931년 서약서원에서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귀부는 7세기 귀부 양식의 변화를 잘 보여주며, 용머리로 변화하기 전 귀부의 원형을 지니고 있어서 한국 석비 받침돌의 초기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종무열왕릉과 김유신묘를 방문하면 이곳도 함께 방문해서 보고 가시길 권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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