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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태릉, 문정왕후의 릉

by 해피이즈나우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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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의 릉, 태릉

 

 

봄이 한발자국씩 다고오는 느낌이 듭니다.

따뜻한 계절이 오면 조선왕릉 숲길을 걸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에 태릉과 강릉에 다녀왔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출을 가급적 삼가는 분위기라 거리의 차들도 한산하고, 왕릉에는 관광객들이 거의 없어서 오히려 관광하기에는 정말 좋은 듯합니다.

 

먼저, 조선왕릉 중에서 공릉동에 있는 태릉에 대해서 정리했습니다.

 

태릉조선 제11대 왕인 중종의 왕비이면서 13대 명종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태릉은 아마도 태릉선수촌과 육군사관학교로 더 많이 알려진 곳입니다.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옆에 있는 것이 1km를 사이에 두고, 태릉과 강릉이 있습니다.

 

문정왕후는 살아있을 때 남편 중종의 능인 정릉을 봉은사 근처로 옮기고 자신도 남편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가 올 때마다 정릉이 침수되자, 아들 명종이 이곳 태릉에 조성하였고, 

이후 아들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능 옆에 강릉으로 조성했다고 합니다.

 

태릉에는 조선왕릉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해둔 조선왕릉 전시장이 있습니다.

 

역사공부를 하는 아이들에게 이곳에서 한나절 정도만 구경시키면 조선역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태릉의 조선왕릉 전시관

 

 

조선왕릉은 총 120기에 이르는데 능이 42기, 원이 14기, 묘가 64기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왕과 왕비의 능은 남한에 40기, 북한에 2기(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묘인 제릉과 정종과 정인왕후의 묘인 후릉)가 있고, 남한에 있는 40기의 능이 2009년 6월 30일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서울 태릉 관람안내

 

관람시간 : 2~5, 9~10월 09:00~18:00, 6~8월 09:00~18:30, 11~1월 09:00~17:00

(입장마감시간은 종료 30분 전까지)

휴무일 : 매주 월요일

관람료 : 25~64세 1,000원, 그 외 무료관람

(태릉과 강릉을 당일 함께 관람가능)

주차장 : 무료

 

5분 정도 걸어가면 태릉이 나옵니다.

태릉은 특히 주위 소나무 숲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소중한 생태문화적 자원이기도 합니다.

 

태릉 모습

 

조선 11대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능입니다.

문정왕후는 1517년(중종 12)에 왕비가 되었죠.

 

 

중종의 첫 번째 왕후는 단경왕후 신씨, 

중종반정으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해서 반정추진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폐위되었습니다.

슬하에 자식은 없었고, 영조 때 복위되었습니다.

 

중종의 두 번째 왕후는 장경왕후 윤씨,

 세자인 인종을 낳고 6일 만에 죽음으로써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성격과 기질이 고약하여 부정적인 영향이 끼쳤고,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야화도 있습니다.

 

인종은 아버지인 중종이 죽고 보위에 오르나 9개월 만에 사망하여(문정왕후에게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음)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 되었습니다. 

 

태릉 정자각 모습

왕릉 제례 때 제향을 올리는 정자 모양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그리고 장경왕후의 아들이 더 이상 없어서 인종이 죽고,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인 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종의 나이는 고작 12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모든 권력을 쥐게 됩니다.

이때 윤원형 등 왕후와 친척이 되는 신하들이 권력을 잡고, 나랏일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문정왕후에 있어서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문정왕후는 불교에 관심이 많아 승려 보우를 신임하고, 승려가 되는 시험인 승과를 설치하는 등 불교를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1565년(명종 20)에 65세로 창덕궁 소덕당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쪽에서 본 태릉 정자각 모습

 

정자각에서 바라론 태릉은 봉분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사초지라는 큰 언덕을 두어 봉분을 볼 수 없게 하는데, 태릉은 김포의 장릉처럼 사초지가 없거나 낮아서 봉분이 그대로 보이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태릉의 석물들은 다른 왕릉에 비해 최대 2배 가까이 크다고 하는데, 당시 수렴청정할 때의 문정왕후의 권력을 상징하는 듯해서 씁쓸한 생각은 드네요.

 

김포 장릉(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태릉 정자각에서 바라본 홍살문까지의 풍경

소나무들이 참 멋지게 심어져 있습니다.

 

왕릉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묵었다는 수복방 모습

 

수복방 위에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은 영조 29년(1753)에 강릉의 표석과 함께 설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표석 앞면은 홍계희의 필체이고, 뒷면의 비문은 악풍군 이무가 썼습니다.

앞문 글씨는 '조선국문정왕후태릉'라고 적혀 있네요.

 

문정왕후의 능 앞에는 오래된 향나무 세 그루가 멋지게 서 있는데요.

 

오랜 세월을 버틴 탓인지 향나무 내부가 많이 비어 시멘트로 채워져 있는 모습입니다.

 

태릉은 문정왕후의 단릉이라 믿기 힘들 만큼 다른 릉에 비해 웅장하다고 합니다.

 

앞에서 석물에 대한 설명을 한 것처럼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요.

 

문정왕후가 생전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인종에게 어떤 짓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인종만 사라지면 자기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 어떤 짓을 못했을까요?

 

다만, 인종의 극진한 효심을 생각하면 인면수심의 왕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종은 키워준 문정왕후에게 효를 다하기 위해 극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생전 지극했던 효심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를 효릉이라 하고, 고양 서삼릉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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