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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의 생애와 활동 (in 겸재정선미술관)

by 언제나 휴식같은 친구 2020.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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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 정선의 생애와 활동 (in 겸재정선미술관)

 

 

겸재정선미술관에 들러 진경산수화를 관람하였는데요.

 

겸재정선미술관, 진경산수화를 보다

 

2층 전시실에는 겸재정선기념실이란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만 배우던 겸재 정선의 생애와 진경산수화를 위한 그의 그림활동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겸재 정선의 출생과 초년시절, 화가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진경산수화풍을 확립한 시기, 완숙기와 노대가의 만년 순으로 겸재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해 두고 있습니다.

 

겸재정선(1676~1759)은 모두 알다시피 진경산수화의 대가입니다.

화성의 칭호를 받을 만큼 우리문화를 빛낸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진경산수화의 완성자라 할 수 있습니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 그림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입니다.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하였을 뿐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을 뚜렷하게 창출하며 전개되었던 화풍 중 하나였죠.

 

겸재 정선은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고유의 화풍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화가였습니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켜 산수유람의 풍조를 확산시키는데 일조하였답니다.

 

겸재 정선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금강전도.

세상의 모든 것을 바위로 만들어 놓은 듯한 만물을 품은 경관과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들이 늘어선 천하의 명승지, 금강산을 그린 그림입니다. 

 

정선의 출생과 초년시절

 

그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대화가로서 84세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수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옛 그림들 중 정선의 그림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은 1976년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리 유란동(현. 청운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광주, 호는 겸재

 

정선은 사족출신으로 문인의 교양을 닦었으나 타고난 그림 재능과 이웃에 살던 진경시의 대가 김창흡의 영향으로 서화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정선이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살게 된 북악산, 인왕산 일대는 서울 문인문화의 중심지이면서 풍광이 뛰어나, 일찍부터 우리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1676년(숙종 2)에 부친 정서익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5대조와 고조부대에는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등 명문가였으나 증조부 이후 벼슬을 하지 못해 집안이 쇠락했다고 합니다.

 

1689년(숙종 15) 14세 때 부친이 52세로 세상을 떠나자 더욱 어려워진 살림이었다고 하네요.

정선은 어려운 형편에도 외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20대에 연안 송씨와 결혼하여 1704년(29세)에 장남 만교를, 1710년(35세)에 차남 만수를 낳았습니다.

 

초년시절 학문과 예술적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같은 동네에 대를 이어 살던 안동김씨 집안이었습니다.

특히, 영의정 김수항(1629~1689)의 여섯 아들들은 정치, 학문, 예술 면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남 김창집은 나중에 영의정이 되고, 둘째 김창협과 셋째 김창흡은 학문과 문학으로, 넷째 김창업은 문학과 그림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이들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셋째 김창흡으로, 김창흡(1653~1722)은 설악산과 금강산을 자주 드나들며 아름다운 강산을 시로 읊어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진경시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1671~1751)과는 평생에 걸친 지기가 되어 시화를 서로 교환했습니다.

 

겸재 정선의 연보

 

겸재 정선의 30대 중엽 ~ 40대 중엽

화가로 이름을 떨치다

 

정선이 그림을 배우게 되는 무렵은 17~18세기 교체기로서 조선시대 회화사상 중기의 절파가 쇠퇴하고 새로이 명말청초의 남종문인화풍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또 윤두서와 초영식 등에 의해 한국적 풍속화가 점차 그려지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정선은 새로 들어오는 문인화풍을 공부하고, 문사로서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 주역에 능통하기도 했습니다.

정선의 그림실력은 37세 때인 1712년 금강산 여행에서 그린 '해악전신첩'이 문사들 사이에 유명해지면서 알려졌습니다.

 

정선의 성년기에 해당하는 18세기 초는 조선화화사에서 중기에서 후기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남북종화론과 문인화풍이 점차 세력을 얻어가고 있던 시기였죠.

 

또한 고씨화보, 당시화보, 태평산수도, 개자원화전 등 각종 화보 판화집이 수집되어 화가들에게 참고되던 시기였습니다.

 

화명을 떨치다

 

정선은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진경시의 대가인 이병연과 절친으로 지내고, 당시 학예계의 지도자인 김창흡의 문하생들과 교류하면서 사상적, 예술적 교양을 쌓기도 했습니다.

 

하양현감시절(46~51세, 1721~1726년)

 

정선은 41세에 관상감의 겸교수(종6품)로 벼슬길에 나갑니다.

이후 46세 때인 1721~172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 대구 근처의 하양현감을 지내는데, 비로소 이 시기에 그의 회화발전과 관련된 본격적인 계기를 맞게 됩니다.

 

정선은 경상도 지역의 다양한 명승을 그린 화첩인 '영남첩', '구학첩'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화첩들은 남아 있지 않아 그 실체를 알 수 없다고 하네요.

 

또한 성주 관아의 객사에 있던 정자를 기른 '쌍도정'과 '도산서원' 등도 경상도 지역 명승을 그린 여러 작품들도 하양현감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왕곡 시절(52~58세, 1727~1733년)

 

하양현감을 마치고 상경한 정선은 이듬해에 그동안 줄곧 살아온 북악산 아래 유란동에서 인왕곡(현재는 옥인동 20번지)으로 이사했습니다.

이곳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이 시기에 친하게 지내던 이춘제가 중국으로 사신 갈 때 서쪽 교외에서 송별하는 모습을 그린 '서교전의(173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정선은 의금부도사(종6품)을 지냈는데, 이때 그린 '의금부(1729년)'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청하현감 시절(58~60세, 1733~1735년)

 

정선은 58세에 경상도 청하현감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십이폭포와 보경사가 있고, 관동팔경과 경주나 경상도 여러 지역이 연결되어 동해안 명승지를 여행할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때 '내연삼용추(삼성미술관 리움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이때 그려진 것이고, '성류굴', '쌍계입암' 등도 이때 그렸습니다.

 

인왕곡 시절(60~65세, 1735~1740년), 영천현령 시절(65~70세, 1740~1745년)

 

60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청하현감을 그만두고 인왕곡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모친상을 치르고 1737년 한강을 거슬러올라 절경이 있는 남한강 상류의 청풍, 단양, 영춘, 영월 등 충청도 사군 지역을 여행하고 '사군첩'을 제작하여 이병연에게 증정했습니다.

 

이때 '관동명승첩'도 있고, 인왕산 주변을 소재로 한 '청풍계(1739년, 간송미술관)'. '한양전경(1740년)' 등도 그렸습니다.

 

양천현령 시절에는 진경산수화를 완숙의 경지로 올려놓은 시기입니다.

5년간 양천현령으로 근무하면서 이병연과 시화를 교환(경교명승첩, 간송미술관 소장)하고, 기념비적인 역작들을 남겼습니다.

 

 

겸재 정선은 화가로서 드물게 84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그래서 보통 화가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화풍의 완성과 완성을 넘어선 대자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겸재 정선은 만 70세에 양천현령을 퇴임한 후 10여년간 인왕곡에서 여유로운 만년기를 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다시 그린 '해악전신첩'에는 실제 경치를 회화적으로 자유롭게 응용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74세 때 그린 '사공도시풍첩', 76세 때의 '인왕재색', 82세의 '청송당' 등은 강하고 부드러운 필력과 진하고 연한 묵법의 농담이 혼연일체 어우러진 경지를 보여줍니다.

 

1747년(72세)에는 인원대비 회갑 수걍으로 종4품, 1755년(80세)에는 영조의 과갑으로 첨지중추부사(정3품)이 되었습니다.

1756년(81세)에는 인원대비 칠순 수경으로 종2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2품 이상 3대 추증 법전에 따라 부친과 조부, 증조부까지 각기 호조참판, 좌승지, 사복시정을 추증받게 되었습니다.

 

주역의 겸괘에서 호 겸재를 따서 평생 겸손하고 온화하게 처신하며, 예술에만 정진해온 대화가에게 적합한 말년의 명예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선은 1759년 3월 24일 8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하고 양주 해동촌면 계성리(현. 쌍문동)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상으로 겸재정선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내용 위주로 정선의 일대기를 정리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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